🎓위조꾼, 거짓말쟁이 : 살아남기 위한

2023. 1. 17.

위조꾼, 거짓말쟁이 : 살아남기 위한

A forger's Life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70), 2023.1.18,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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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레터에는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의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키워드: 위조, 거짓말, 나치, 생존, 합법

1.머리말

2.어쩌다, 위조꾼 : <위조꾼의 인생>

3.어쩌다, 거짓말 : <페르시아어 수업>

4.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 9일 프랑스 사진작가 아돌포 카민스키(Adolfo Kaminsky)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프랑스계 유태인인 그는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만명이 넘는 유태인을 구해낸 레지스탕스입니다. 그가 죽자 많은 언론 및 단체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고가 실린 신문을 읽다가 문득 눈길이 머문 대목이 있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책과 다큐멘터리의 제목 두개 모두 <아돌포 카민스키, 위조꾼의 인생Adolfo Kaminsky : A Forger‘s Life>(Sarah Kaminsy, 2009) <위조꾼The Forger>(NYT, 2016)이었다는 점이었죠. 즉 그의 레지스탕스 활동의 핵심은 ‘위조’였습니다.

<fig.1> 아돌포 카민스키(왼쪽) 그의 딸이 쓴 자서전 형식의 책 <아돌포 카민스키, 위조꾼의 인생> 표지. AFP연합, DoppelHouse Press

카민스키는 처음부터 위조꾼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위조를 하게 되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이런 일을 수십년간 해왔을까? 등이 궁금해져서 조금 해찰해보기로 했습니다.

【2.어쩌다, 위조꾼 : <위조꾼의 인생>】

“당신은 어떻게 하다가 위조꾼이 되었습니까?” “위조꾼이 꿈이었습니까?” 아돌포 카민스키는 생전에 실제로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았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죠.

“글쎄요?...뭐, 어쩌다보니by chance.”

<아돌포 카민스키, 위조꾼의 인생>(이하 <위조꾼의 인생>)은 그의 딸이자 작가인 사라 카민스키가 20여회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인 아돌포 카민스키의 삶을 자서전 형태로 써낸 책입니다.

’맨날 보는 아버지의 삶을 뭐하러 수십번 인터뷰까지 해서 써야 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사라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까지도 아버지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가 반평생동안 ’위조‘를 해왔다는 것조차도요. (영상) 그러던 차에 아버지가 77세가 되었고, 이러다가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겠다라는 조바심이 들어 그의 삶에 대해 자세히 듣기로 결심을 하죠. 그렇게 해서 출간된 책이 바로 <위조꾼의 인생>입니다.

<fig.2> 아돌포 카민스키가 직접 찍은 위조 여권들. 그는 낮엔 사진사로 일하고, 밤엔 위조사로 일하면서 수십년간 '저항'으로서의 위조를 계속했습니다. 이 사진에서 우하단에 보이는 여권은 카민스키가 만든 자신의 위조 여권입니다(Julien Keller).(왼쪽) 그의 딸이자 <위조꾼의 인생> 저자인 사라 카민스키가 TED 영상에서 아버지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Adolfo Kaminsky, TED 유튜브 갈무리

그의 어린시절은 비교적 평범한(할 수도 있었던) ‘염색 덕후’의 삶이었습니다.
1925년 러시아계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돌포 카민스키는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 Vire에서 비교적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1940년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지만 그가 살던 곳은 시골마을이라 전쟁의 여파가 아직 닥쳐오지 않았었죠. 그는 어려서부터 가계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서 15살 무렵 염색사로 취직했는데요. 염색의 매력에 푹 빠져서 이것저것 물들이고 실험을 하다가 집의 집기를 다 망쳐놓아 큰 꾸중을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화학에 관심이 생겨 낙농업체에 가서 화학 보조원으로 일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하면 더 잘 물들일 수 있을까?’를 밤낮 궁리하다보니, 자연히 ‘가장 까다로운 과제’들은 어린 카민스키의 몫이 되었다고 하네요.

“우리집은 가난했고 나는 일을 해야만 했어요. 그렇게 옷 염색일을 시작하게 됐죠. 거기서 저는 마법같은 색깔의 세계와 만나게 되었어요[...]저는 집에서 모든 세탁용 통과 냄비 등을 꺼내와서 염색 연구를 했죠. 그리고 재앙이 닥쳤습니다. 엄마가 접시마다 색색깔로 그 난리를 피워놓은 것을 보고 엄청나게 화를 냈죠. 사장은 이 얘길 듣고 크게 웃으며, 가장 힘든 과제들을 내게 주었어요. 예를 들면 잉크 얼룩이 묻은 실크 웨딩드레스 같은 것 말이죠...” -NYT, <The Forger>(2016)

하지만 1941년 삼촌을 찾으러 갔던 그의 어머니가 나치에 의해 죽고, 1943년 그의 가족 및 지인들이 Drancy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그의 삶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소지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여권 덕에 그의 가족은 3개월만에 수용소에서 탈출할 수 있었지만, 당시 수용소에서 그와 함께 어울렸던 ’대부분의 나머지 유태인들‘은 목숨을 잃었죠. 그는 이후 죽는 날까지 “목숨을 빚진”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fig.3> "염색사라고? 그렇다면 잉크 얼룩을 어떻게 지우는지 알고 있어?" 카민스키가 처음 '위조꾼'으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NYT 유튜브 갈무리

그의 말마따나 그가 ‘위조사’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습니다.
카민스키는 단 한번도 ’위조 기술‘을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이 좋아했던 염색 기술을 파고들었을 뿐이었죠. 하지만 카민스키는 워낙 염색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독학으로 공부하다보니 당시 기술로서는 절대 위조(지우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워터맨Waterman사의 푸른 잉크를 지우는 방법까지도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잉크는 위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공식 문서, 여권 등에 사용되고 있었죠. 어린 유태인 꼬마가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그를 당장 ‘위조꾼’으로 임명하고 엄청난 일을 맡깁니다.

때로 상황이 다급할 땐 잠도 못잘 정도로 일을 했는데요. 특히 어느날은 한꺼번에 사흘만에 300명분의 서류를 위조하라는 미션이 떨어집니다.

“몇명이냐고?[...]300명은 넘을거야.” 300명이라는 건, 900개의 서로 다른 서류를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단 3일만에! 완전 불가능했다. 일반적으로 하루에 문서 30~50개 정도의 요청이 들어오고, 간혹 그보다 조금 더 많을 때가 있었다[...]깨어있어야 돼. 가능한한 오래. 잠에 맞서 싸워야 해. 이건 간단한 계산이었다 : 나는 한 시간에 빈 서류 30개를 만들 수 있다; 만약 내가 한 시간 자면, 30명이 죽을 것이다. -사라 카민스키, <위조꾼의 인생>

애초에 당파적 목적에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또한 스스로가 ’전문 위조꾼‘으로 직업을 삼으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그는 베트남, 알제리 전쟁 등과 관련해 부당징집, 반전 운동가들을 위한 위조를 지속해갑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습니다. “부당하게 목숨이 사라지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시체가 있었어요...너무 많은 시체.” 이런 작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끝나죠.

그는 거의 30년 동안 위조를 해왔습니다만, 그의 직업은 한번도 위조꾼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만약 직업이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방법이라고 한다면요. 그는 위조를 할 땐 반드시 돈을 받지 않고 일했습니다. 비록 정의를 위해 위조를 했다곤 해도 그는 항상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많았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서도 정착해서 아이들을 돌보며 살기 어려웠죠. 만약 위조를 통해 돈을 받으면 자신이 신념에 따라 거절할 수 없기 때문에, 돈을 받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했습니다. 대신 돈은 낮에 사진사 등으로 일하며 벌었죠.

수많은 유태인들이 ‘우연히’ 목숨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위조꾼이 된 것은 잔혹한 시대가 만들어낸 ’우연‘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그는 화학자로서 성공하거나 존경받는 염색장인 할아버지가 되었겠죠. 많은 죄 없는 목숨들이 사라질 이유도 없었을테고요.

자신의 삶을 차분하고 객관적인 어조로 덤덤히 서술하고 있는 <위조꾼의 인생>의 마지막 대목에서야 아돌포 카민스키는 조금 자신의 마음을 꺼내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위조꾼’으로서의 삶을 돌이켜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지금도 가끔 열일곱 살 때 처음으로 위조한 문서가 생각난다[...]위조자로서 나의 삶은 나치 시대 이후에도 불평등, 분리, 인종 차별, 파시즘, 독재에 계속 저항하기 위한 끊임없는 저항이었다[...]현실은 손 놓고 바라보고만 있기엔 너무나도 참혹했다. 지난 30년 간 내가 가진 기술에 대한 지식, 독창성, 확고한 유토피아적 이상이라는 유일한 무기를 갖고 싸워왔다. 내게 앞날을 바꿀 힘이 있고, 미래에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할 것이며 거기에 기여할 수 있다는 확신 덕분이었다. 아무도 위조자를 필요로하지 않는 세상. 여전히 나의 꿈이다.”

-사라 카민스키, <위조꾼의 인생>

【3.어쩌다, 거짓말 : <페르시아어 수업>】

야만의 시대에,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카민스키가 만든 위조 여권이 아니었다면 수만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바딤 피얼만 감독의 <페르시아어 수업>(2020) 역시 그러한 ‘살아남기 위한 거짓말’에 대한 영화입니다. 볼프강 콜하세의 실화 기반 단편 소설 ‘언어의 발명’(1977)을 기반으로 한 작품입니다.

나치에 붙잡힌 유태인 주인공 ‘질’은 총살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나는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엄청난 우연으로, 당시 그를 붙잡은 군인들의 상관(코흐 대위)이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의 전속 페르시아어 교사가 되죠. 모든 것은 완벽했습니다. 그가 아는 페르시아 단어라곤 ‘바바(아빠)’ 하나 뿐이라는 것만 빼면요.

<fig.4> <페르시아어 수업>영화 포스터 (왼쪽) 배경이 된 볼프강 콜하세의 단편 소설 '언어의 발명Erfindung Einer Sprache' 표지. 유명한 각본가이기도 한 볼프강 콜하세는 이 소설을 2차대전에 참전했던 한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 영화의 주된 테마는 ‘거짓말’이 됩니다. 어떻게 페르시아어를 하나도 모르는 주인공이 페르시아인으로서 대위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들키지 않고 관계를 지속해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얼핏 단순해보이는 플롯이지만 풍부한 은유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제가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돌포 카민스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쩌다보니’라는 키워드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된 인물은 ‘질(레자 준)’과 코흐 대위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모두 ‘어쩌다보니’였습니다.

영화에서 코흐 대위는 온전한 ‘악당’으로 묘사되진 않습니다. 그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 출신이고,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이유는 테헤란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부하들에겐 엄격하지만 자신에게 언어를 가르쳐주는 질을 각별히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나치에 가입하게 된 이유도 ‘어쩌다보니’입니다. 어느날 길거리를 걷다가 갈색 셔츠를 입은 당원 청년들이 수다를 떨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길로 당에 가입했죠.

한편 주인공의 삶에 대해서는 그의 아버지가 랍비라는 것 외에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데요. 그 역시 ‘어쩌다보니’ 유태인으로 태어나, ‘어쩌다보니’ 잡혀서 죽을 위기에 처하고, ‘어쩌다보니’ 그 자리에서 코흐 대위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어쩌다보니’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돛을 부풀리는 순풍같은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거짓말을 해야만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는 파괴적인 함정인 것입니다.

<fig.5> <페르시아어 수업> 영화의 스틸컷. 주인공 질(왼쪽)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코흐 대위에게 매일 단어 4개씩, 총 2.850개의 단어를 만들고 가르칩니다. ⓒ영화사 진진

<페르시아어 수업>에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숫제 ‘가상의 페르시아어’로 대위와 주인공이 서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과연 어떤 사람이 전혀 모르는 언어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이전에 수천개의 단어를 순발력을 발휘해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스스로 기억하는 것부터가 큰일입니다. 주인공도 언어의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엄청난 애를 먹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발견한 방법이란, 수용소 수감자들의 명부에서 이름 일부를 활용해 단어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소재가 마를 걱정도 없고, 때때로 명부를 보며 외울 수도 있으니까요.

훗날 아이러니하게도 ‘거짓투성이’인 이 ‘가짜 페르시아어’는 유일한 진실의 증거가 됩니다. 전쟁 후반 전력이 밀리자 나치는 수용소들의 학대, 학살 흔적을 말살하기 위해 수용소 사진이나 명부 등을 모조리 불태우는데요. 이는 질이 있던 수용소도 마찬가지였고, 이 때문에 훗날 그 수용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증거는 ‘가짜 페르시아어’로만 남은 것이죠.

나치가 증거를 불태우고 무수히 죽어간 ‘이름 없는 자들’을 역사의 무덤에 묻으려 해도 질의 ‘거짓말’만은 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바딤 피얼만 감독은 말합니다.(링크)

“기억Memory은, 창의력만큼이나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저는 인간의 창의력, 그리고 강한 인간의 영혼이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놀랍다고 생각해요[...]이 이야기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질이 수감자들의 이름을 외국어로 바꿀 때 곧 그것은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살아남게 만드는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전쟁 중에는, 나치에 의해 명부와 아카이브들이 전부 불타면서 수용소에 있던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4.누가 거짓말을 하는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이 ‘합법‘인 시대, 거짓이 곧 진실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은 ‘거짓말’ ‘위법’을 해야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다 보면 위법과 합법,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마리아 베테티니의 <거짓말에 관한 작은 역사>는 거짓말의 다양한 측면을 역사적으로 두루 고찰하고 있는 책인데요.

그 중에서도 제 눈길을 끈 흥미로운 부분은 ‘거짓말이 만든 역사’에 대한 대목입니다. 역사적으로 거짓말은 커다란 악덕 중 하나로 손꼽혀왔지만, 실제 역사에선 권력자에 의한 거짓말이 커다란 역사의 물길을 ‘만든’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중세 유럽의 유명한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 기증장’은 로마 황제가 교황에게 제국의 서쪽 절반을 증여한다는 내용의 서신인데요. 이 문서는 원래 313년에 작성된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알고보니 754년 정치적인 목적으로 위조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문서를 근거로 교황 측 세력이 교회 국가의 탄생을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죠.(위키)

<fig.6> 교황 실베스터 1세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서 칙령을 받는 장면을 묘사한 13세기 프레스코화(왼쪽) 마르틴 루터가 쓴 책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On the Jews and their Lies>. 이 책의 내용은 훗날 나치의 유태인 증오 선동에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Wikipedia, RiverCrest Publishing

나아가 저자는 수많은 역사적 비극들이 권력자의 ‘거짓말’에 의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출간된 마르틴 루터의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유태인이란 “사악하고 고집스런 민족”이며 “진정한 거짓말쟁이이며 잔학한 민족”, “우쭐거리고 교만한 무뢰한과 같은 민족[...]다른 민족을 깔보고 원망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민족”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 때문에 루터는 “유대인의 교당과 학교에 불을 지르고, 집을 부수고, 자유롭게 나다닐 권리를 금지하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죠. 이 책은 훗날 나치가 그들의 선전에 이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차이라면, 현대로 올 수록 굳이 ‘거짓 증오’를 신랄하게 내세우지 않아도, 증오의 이유를 ‘객관적인 진실’인양 선포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의 성향이 ‘증오스럽기 때문에 차별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 객관적으로 이들이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거나, 위험하기 때문에 이들을 차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누군가를 중상하는 데 그렇게 크고 완강한 증오가 필요했을까?[...]400년 후 또 다른 책(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이 나오는데, 이것은 거짓말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서1) 똑같은 생각과 제안을 유포시켰다.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하고 솔직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다. “민족적 세계관은 따라서 인종의 평등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인종들의 상이성과 인종들의 우수한 가치와 열등한 가치를 알고 있다.”[...]아마도 지난 세기의 가장 비극적인 기만행위는 진리와 진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의 방조 아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마리아 베테티니, <거짓말에 관한 작은 역사>

이 대목을 읽으며 저는 곰곰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폭력, 기만행위가 숫제 '진리' '객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시대에도, 과연 표면에만 돋보기를 가져다대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요.

1)'거짓말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서'라는 대목의 의미는, 많은 철학자들이 '거짓말'의 핵심 조건으로 '거짓말하고자 하는 의지'를 꼽아왔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방바닥에서 100원을 발견하고 뛰어나가 바닥에 100원이 있다고 외쳤는데, 나중에 보니 강아지가 동전을 물어가버려서 없었다면, 제가 거짓말을 하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이 될 수 없다는 것이죠. 혹은 제가 돌멩이를 100원으로 착각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장선상에서 해리 프랑크퍼트는 철학 논문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링크)에서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를 엄격하게 구분하는데, 이 둘의 가장 큰 차이는 '개소리쟁이'는 자기가 거짓말을 한다는 인식조차 없이(참거짓에 대한 관심 없이) 자기가 옳다는 걸 무작정 ('진정성'있게) 주장하는 이들을 뜻하고, '거짓말쟁이'는 적어도 자기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있는 이들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프랑크퍼트는 '개소리쟁이'가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위 인용 대목에서 히틀러는 '개소리쟁이'에 가깝습니다.

【5.맺음말】

‘때론 당대에 ‘진실’로 여겨지는 것이 ‘거짓’보다 더 거짓일 수 있다(따라서 그 맥락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페르시아어 수업> 영화 중 주인공이 샌드위치 반쪽과 페르시아어 책을 바꾸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은 같이 붙잡혀온 한 남성과 트럭 안에서 샌드위치 반쪽을 책과 바꾸는데, 이 책은 그 남자가 훔친 책이었습니다. 이 때 랍비의 아들인 질은 “도둑질을 하지 말지니라”라는 십계명 구절을 읊조립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찬가지로 십계명 가운데 하나인 “거짓 증언 하지 말지니라”를 줄창 어기는 내용입니다.

오늘 다룬 아돌포 카민스키의 삶, 질의 거짓말같은 삶은 오늘날 보기엔 ‘영웅’ ‘위대한 생존자’의 삶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당대의 눈으로 봤을 땐 가족에게도 자신의 일을 숨겨야 하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위조꾼이자 언제 들통날지 몰라 조마조마한 거짓말쟁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질은 살아남아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카민스키는 “도저히 두손 놓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위법’들이 존재합니다. 그중 훗날 역사적으로 ‘악’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명의 거짓말쟁이와 위조꾼의 이야기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

“각자의 몫을 제대로 받으리라Jedem das Seine”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중, 부헨발트 수용소 문 위에 적혔던 문구

wikipemedia commons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Sarah Kaminsky, Mike Mitchell, 『Adolfo Kaminsky : A Forger‘s Life』, DoppelHouse Press, 2017.

-아돌포 카민스키의 딸인 사라 카민스키가 쓴 자서전 형식의 책입니다. 2009년에 프랑스어판이 나왔고, 이후 2017년 영문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아돌포 카민스키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등을 아울러 '위조꾼'을 그만두게 된 1971년까지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통상 그의 (위조꾼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할 때 1945년을 기점으로 끝나곤 하는데, 그의 위조 이력은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도 장장 40년에 걸쳐 계속됩니다. 사실 이 책을 집어들게 된 이유는 그가 위조를 하면서 느낀 점, 내면의 딜레마 등을 알고 싶어서였는데 아무래도 딸이 인터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다보니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사실관계가 주가 되고 있는 점은 다소 아쉽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오히려 부녀사이라는 점이 인터뷰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는 타임즈오브이스라엘지와의 인터뷰 내용이 있습니다.("제 생각엔 아마도 아버지가 저와 이 슬픈 이야기들을 모두 공유하고 싶어하진 않는 것 같았어요"·링크)

[영화] 바딤 피얼먼, <페르시아어 수업>, 127min, 2020.

-실화 기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페르시아어를 모르는 사람이 가상의 페르시아어를 만들어내 가르친다"라는 컨셉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심지어 그 언어를 통해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는 점도 놀랍고요. 저번 회차 레터가 마침 공교롭게도 '패스트 무비(영화요약)'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영화를 '단순 요약'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측면에 주목해보고 - 오히려 이 글을 통해 영화를 보러가고 싶어지도록 쓸지를 고민했습니다. 2020년 제작 영화지만, 국내에선 현재 상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저번 회차 레터 '글 속 한 문장' 코너에서 소개했던 작은 영화관(링크)에 가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마리아 베테티니, 장충섭 옮김, 『거짓말에 관한 작은 역사』, 가람기획, 2006.

-제목대로 역사적으로 '거짓말'을 어떻게 보고, 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려왔는지를 간략하게 짚고 있는 책입니다. 사실 '거짓말에 관한 역사'이지만 어쩌면 이 책의 결론을 보면 'fiction'의 가치에 대한 책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거짓말이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해서, 거짓말을 이모저모 뜯어보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오늘 레터의 논지와는 별 상관은 없지만, 책의 중간에 <걸리버 여행기> 중 후이넘들의 언어/거짓말에 대한 인식을 쓴 부분이 흥미로운 해찰 포인트였습니다. 일부 옮겨봅니다.

"후이넘은 걸리버에게 죄를 묻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가 아니라, 그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는 죄목을 씌운다는 점 이다. 후이넘들에게는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누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면, 그것을 듣는 사람의 정보 수준을 떨어뜨리는 일종의 실수로 여긴다."(p.55)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존재가 ‘불법’일 수 있는가

독서시간: 약 10분 / 글자수: 약 3800자

🖍글 속 한 문장

이 책은 미등록 이주 아동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존재를 가르는 불법과 합법의 구분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묻고 경계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한 민주적인 책임과 관심의 필요를 논한다[...]합법과 불법의 경계는 누군가의 지위를 바깥으로 밀어내지만, 존재가 밀려나도 되는 아이는 없기 때문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미등록 이주 아동문제를 다룬 은유 작가의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2022)에 대한 책 소개 글입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살피고, 그 안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궁리해봅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벅찰 때, 거짓말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1500자

🖍글 속 한 문장

‘모두가 그저 각자 몫의 삶만 산다면 신화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했다.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죄다 이해하기가 벅차서 허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좋은 거짓말에는 빛도 어둠도 풍부하게 담겨있다. 그와 함께 지어낸 거짓말로 진실 쪽을 가리키고 싶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이슬아 작가가 쓴 '거짓말'에 대한 칼럼입니다. 오늘 레터 본문에서 다룬 맥락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또 다른 현실을 상상하고, 현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fiction'으로서의 거짓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레터에서 일부 다룬 <거짓말에 관한 작은 역사>도 결말 부분에선 거짓말의 이런 측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혐오 조장은 “인류에 대한 범죄”

독서시간: 약 19분 / 글자수: 약 5800자

🖍글 속 한 문장

빅토르 클렘퍼러는 “나치즘은 수백만 번의 반복을 통해 한 가지 단어, 관용어, 문장들을 사람들에게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침투시켜 사람들의 살과 피 속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게 했다”라고 기술했다[...]역사상 처음으로 전쟁 법정은 나치의 호전성, 공격성 그리고 대량 학살에 찬동하는 말을 하거나 영상을 만들거나 글을 씀으로 기여한 선전자-개인들을 법정에 세웠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의 '유죄 평가' 항목 문서입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직접적으로 학살에 가담한 이들 외에, 체제의 ‘선전자’들에게도 최초로 중범죄를 선고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선전자들에게 역사상 최초이고 혐오 조장을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선고한 것은 지금까지도 큰 의미를 갖습니다.

나치 독일서 ‘일반인’으로 산 유태인들

영문 / npr

🖍글 속 한 문장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이 나치였고 조직적인 저항도 없었다. 독일의 유태인들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숨어야 했다. "유태인들은 아리안처럼 보이는 새로운 정체성을 발명했다[...]그들은 눈에 띄었다. 영상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교류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가짜 정체성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만약 어느날 갑자기 이름과 외모, 정체성을 모두 바꾼 채 친숙한 동네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나치 치하 유태인들이 독일을 떠나지 않고 정체성과 외모를 철저히 바꾸고 거의 평생 살아갔던 사례들을 토대로 만든 영화 <The Invisibles>(2019·링크)에 대한 npr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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