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감기’와 ‘느리게보기’ : 콘텐츠 산책자

2023. 1. 10.

‘빨리감기’와 ‘느리게보기’ : 콘텐츠 산책자

Physiologie du flâneur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69), 2023.1.11,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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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OTT, 빨리 감기,산책, 감상, 영상

1.머리말

2.‘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3.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4.관광객, 무위도식자, 산책자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해 말 일본에선 영화 요약 영상(패스트 무비)을 업로드해 수익을 얻은 유튜버에게 우리 돈 약 5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판결이 내려졌습니다.(기사) 일본에서 패스트 무비 영상 총 조회수는 5억회에 달하고 피해는 약 9800억원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 소식은 주로 저작권 차원에서 이슈가 되었는데요. 또한 이 기사는 “아니, 요즘엔 영화를 후딱 보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군!”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콘텐츠 소비 습관은 ‘빨리 감기’ ‘요약’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볼 것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적습니다. 수십년 전엔 책 한 권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뜯어읽곤 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늘 마저 넘겨야 할 페이지와 마저 내려야 할 스크롤과 마저 눌러야 할 재생버튼 사이에 있”습니다.1) 그리고 ‘빨리 감기’ 습관은 보통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죠.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을 감상하는’ 처사라는 식으로요.

<fig.1> 영화관 시청이나 TV와는 달리 유튜브나 OTT에선 언제든 멈추기, 건너뛰기가 가능합니다.(왼쪽) "So many books, So little time"이라는 명언을 패러디한 "So many shows, So little time"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Getty images, SiGo

다만 모든 ‘빨리 감기’가 무조건 나쁜 것인지, 또한 빨리 감기를 안(못)하던 시절 사람들의 콘텐츠 소비 습관은 완벽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듭니다.
저 역시 큰 인기이지만 ‘정주행’ 할 여유가 없거나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콘텐츠는, 빨리 감기나 블로그 요약으로 대강 살펴보곤 하는데요. 혹은 거꾸로 요약 영상을 보다가 관심이 생겨 본편을 찾아보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능의 경우 숫제 영상조차 아니고 캡처로 접하는 경우도 많고요.2)
그리고 예전에 어디선가 책이라는 매체의 장점으로 “책은 영상과 달리 자유자재로 뛰어넘고, 건너뛰고,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며 볼 수 있다”는 것을 꼽은 글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책에도 만약 빨리 감기라는 말을 붙이는 게 가능하다면, 평소의 저는 ‘빨리 감기 대마왕’인 것입니다. (그래봤자 거북이가 분발하는 정도긴 하지만요)

분명히 빨리 감기로는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종류의 콘텐츠가 있습니다. 저는 쌀밥을 초콜릿에 비벼 먹고 싶지 않은것 만큼이나 <헤어질 결심>을 빨리 감기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레터에서는 통상 ‘빨리 감기는 나빠!’라는 이야기에서 한 발 나아가서(혹은 단지 옆길로 빠져서), 사람들이 빨리 감기를 왜 그리고 언제 하는지, 콘텐츠는 다 같은 콘텐츠인지, 어떻게 하면 콘텐츠 숲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해 해찰해보겠습니다.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루이 후아르트의 <산책자 생리학> 등을 지팡이 삼았습니다.

1)서해인, <콘텐츠 만드는 마음>, 문예출판사, 2022.

2)많은 연예전문매체들은 이슈가 되는 예능 방송의 캡처 사진과 함께 당일 방송을 요약한 텍스트를 기사 형태로 꾸준히 내보내왔습니다. 이 역시 예능을 '짤방' 혹은 '빨리 감기' 요약본으로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2.‘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이나다 도요시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2022,이하 <빨리 감기>)은 발간 이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입니다.

이 책은 처음 일본의 한 매체에 같은 제목으로 칼럼이 실렸다가, 큰 호응을 얻고 추가 조사, 집필을 통해 재빠르게 세상에 나왔는데요. 그만큼 ‘빨리 감기’와 관련된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매우 크다는 뜻이겠죠.

<fig.2>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한국어판책 표지(왼쪽) 저자인 이나다 도요시(稲田豊史)가 NHK 프로그램에 나와서 '빨리 감기' 시청 습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지성, NHK

<빨리 감기>의 부제는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인데요. 저자는 이 책에서 ‘가성비’를 키워드 삼아 젊은층의 콘텐츠 소비 패턴을 살펴봅니다.

이 책을 꿰뚫는 저자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요즘 사람들은 콘텐츠를 볼 때 가성비에 목 맬까?”

저자는 이 책에서 주로 OTT 환경에서의 영화, 드라마 소비 습관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같은 돈’을 내고서 영상을 무한대로 볼 수 있는 사상 초유의 환경이 갖춰지다보니, 콘텐츠에 있어서 ‘가성비’가 최대 가치가 됐습니다. 뷔페에서 같은 입장료라면 되도록 과식하려 애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영상 작품을, 가장 값싸게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예전엔) 수많은 영상을 보려면 그만큼 돈을 들일 각오를 해야 했고, 기껏해야 영화 마니아나 드라마 애호가, 애니메이션 팬 정도만 그만한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활용하면 매달 천 엔 내외의 저렴한 비용으로 ‘원하는 만큼’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하 동일)

이 밖에도 이 책에선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 검증된 콘텐츠만 ‘습득’하려는 안전주의, 실패할 돈과 시간 여유 부족 등이 ‘빨리 감기’를 하는 주된 이유로 꼽힙니다.

빨리 감기, 10초 건너뛰기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시간 가성비’다[...]지름길을 찾는다.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낭비이기 때문이다[...]낭비는 악이다. 가성비야말로 정의다[...]“같은 작품을 볼 수 있다면[...]아마존 프라임보다 빠르게 건너뛸 수 있는 넷플릭스로 시청하죠”

이상에서 눈치챌 수 있듯, 저자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그닥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빨리 감기>의 주장은 “영화마저 빨리 감기로 보는 요즘 사람들은 딱하다. 하지만 상황이 도무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런 습관을 어느정도는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정도로 요약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는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며 어느정도 마음을 추스린 것 같았지만, <빨리 감기>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무관심한 고객들’입니다.(아마도 무관심해서 좋다는 의미는 아닐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또 다시 이렇게 한탄하며 책을 끝맺습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본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들은 저자의 말대로 “미술관 작품을 자전거를 타고 보려는” 사람,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조차도 발을 동동 구르며 보는 사람들입니다.

겸손한 독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반성의 기회와 교훈을 얻게 되고 조금은 시무룩해질 수 있습니다.

【3.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한편 저는 이 책에서 조금 다른 측면에 주목해보고 싶었습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의 문제인데요.

저자는 <빨리 감기>의 결말에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대충 보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에 이젠 패스트푸드식 콘텐츠 소비 습관을 감안한 영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각본가들의 말을 인용합니다(“숨 쉴 틈도 없이 전체를 단번에 보여주는 구성을 취해야...”). 하지만 거꾸로 ‘패스트푸드식 콘텐츠’가 늘었기 때문에 ‘빨리 감기’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문제는 비단 콘텐츠 업계 뿐 아니라 많은 업계가 갖고 있는 딜레마일텐데요.

‘안목 없는 소비자들’ 때문에 좋은 원두 대신 탄 맛만 잔뜩 나는 커피를 팔고, ‘산만한 뉴스 소비자들’에 맞추느라 제목에 ‘경악’을 넣고 정작 본문은 엉뚱한 내용으로 가득 채운 뻥튀기같은 기사를 쓴다는 걸 정당화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런 말은 생산자 입장에서 어느정도는 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서 거꾸로 생각해본다면, 어느 커피집에 가든지 탄 맛밖에 안나는 검은 물만 먹을 수 있고 어떤 기사를 열어보든 그저그런 자극적인 낚시만 가득하다면 언젠가는 진절머리가 날 것입니다.

<fig.3> 커피 맛에 신경쓰지 않는 소비자들이 많아서 커피가 맛이 없는 걸까요. 아니면 커피가 맛이 없어서 커피에 관심 없는 소비자들이 많은 걸까요?(왼쪽) "요새 넷플릭스 범죄 다큐멘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였지???'-장장 5시간의 에피소드들-'알 수 없음' unsplash, Twitter

실제로 ‘OTT플랫폼’이 바꾸어놓은 것은 비단 ‘소비 습관’ 뿐이 아닙니다. OTT는 ‘생산 습관’도 크게 바꾸었습니다. 한편으로 압축할 수 있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굳이 길게 늘여 체류시간을 늘리고, 유행하는 컨셉들을 모아 ‘먹힐 것 같은 쇼’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런 경향은 경쟁 강화로 인해 “술 취한 선원들이 돈을 마구 쓰는 시대”는 가고 수익성이 떨어지면서(링크)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생각해보면 뷔페에서도 실제로 몇몇 ‘킬러 메뉴’(“그 뷔페에 가면 킹크랩을 맘껏 먹을 수 있대!”)를 제외하곤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메뉴들이 대부분이죠.

<빨리 감기>에서 대부분의 인터뷰는 ‘빨리 감기하는 요즘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혹은 어리둥절해하며 보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자기 나름의 주관을 갖고 ‘빨리 볼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어 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사람들을 “‘감상’과 ‘소비’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유메메씨에게도 감상과 소비 사이에 명확한 선이 있었다. “무턱대고 빨리 감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작품을 접하자마자 바로 선별하는 거죠. 천천히 소화하면서 흘러가는 대로 보고 싶은지, 결말을 조금 더 빠르게 보고 싶은지요.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기생충>같은 작품은 온전히 감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이슈가 된 작품을 따라 만든 것 같은 영상은 정보 수집 모드로 봅니다. ‘왜 유행이지?’ 하면서요...”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게) 왜 문제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최근에 읽었던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1953)이 떠올랐는데요. 이 책은 통상 ‘정부가 책을 모조리 불태우는 디스토피아 SF 소설’이라는 컨셉 정도로 유명하지만, 실제 읽어보면 ‘우리가 마음을 쏟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제대로 응시한다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fig.4> <화씨451Fahrenheit 451>(2018,HBO) 영화 속 '방화수'들이 적발한 책들을 불태우기 위해 쏟아버리는 장면(왼쪽) <화씨451> 세계에서 사람들은 모든 벽면에 거대한 TV가 붙어있는 집에 살면서, 진짜 인간과 속깊은 교류를 하는 대신 화면 속 인물들을 '친척'으로 여기며 삽니다. '방화수'인 주인공 몬태그가 어느날 책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모습(영상) / HBO, TED-Ed

<화씨 451>에선 정부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가벼운 TV오락쇼만 권장하고 모든 ‘골치아픈’ 책들을 다 불태웁니다. 이 세계에선 속도와 가성비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소설 속 거리의 광고판은 옛날엔 6미터 길이였지만, ‘오늘날’엔 60미터로 10배나 길어졌습니다. 그만큼 거리를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속력이 빨라졌기에, 광고판이 같은 정도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면 더 길어져야 하기 때문이죠. 저는 이 대목에서 ‘빨리 감기’를 감안해 자극적인 정보를 욱여넣고 길게 늘인 ‘OTT용 콘텐츠’를 떠올렸습니다.

이 책에서 레이 브래드버리가 ‘천천히 보기’의 가치를 강조할 때, 그게 과연 60미터짜리 광고판을 응시하라는 뜻일까요?

또한 <화씨 451>에서 저자가 굉장히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천천히 보기’ 뿐 아니라 ‘천천히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작중 한 캐릭터(파버)의 입을 빌어 책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기도 합니다(1.정보의 질 2.그것을 볼 시간 3.읽고 배울 자유). 아무 책이나 다 훌륭하다는 건 아니죠.

“책 자체에는 전혀 신비스럽거나 마술적인 매력이 없소. 그 매력은 오로지 책이 말하는 내용에 있는 거요. 우주의 삼라만상들을 어떤 식으로 조각조각 기워서 훌륭한 옷으로 내보여 주는지[…]책은 아주 세밀하게 짜여진 것이오. (‘좋은 질’의 책에는) 아주 작은 숨구멍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붙어 있소.”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이런 시각을 고려해본다면, 위에서 인용한 ‘유메메씨’는 사랑할만한 것은 제대로 사랑하고, 대충 만들어진 것은 대충 흘려보내는 식으로 나름 주체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빨리 감기>에는 유메메씨 외에도 다양한 방식, 레이어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연기 구성이나 대사 타이밍은 무대를 보면서 즐기기 때문에 영상에서까지 그걸 추구하지는 않아요. 영상을 볼 땐 내 마음대로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는 재미나 ‘편안함’을 추구해요.”(p.39 연극 관람이 취미지만 넷플릭스는 빨리 감기로 보는 여성)

＊“영화관에서는 무서워서 못 보는 호러 영화를 '몰아보기'로 봐요. 무서운 걸 잘 못 보지만 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요약본으로 보면 무섭지 않거든요" 무서우면 안 보는 선택지는 없는지 묻자 '호기심이 생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무카데 인간>(2010)이라는 아주 그로테스크한 영화가 있는데 요약본으로 알기 전까지는 영화에 그런 장르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p.52 광고대행사에서 일하는 20대 여성)

＊“제가 작가라면 (빨리 감기를 하지 않고) 작품을 온전한 형태로 즐겨주길 바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몰아보기' 영상을 챙겨보고 있었다. 그들은 “본편이 길어서, 전체를 보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이 또한 하나의 장르로 즐긴다”라고 했다.(p.53 남자 대학생)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저는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제각기 다양한 레이어로 작품들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콘텐츠 폭식을 조장하는 세상에서, 경의를 표할만한 작품엔 충분히 경의를 표하고 가벼운 예능이나 양산형 드라마는 적당히 빨리 감기로 넘기면서요. 단순한 호기심이나 대화에 끼고 싶은 마음이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대체 어떤 드라마길래 이 난리야?’). 저 역시 평소 그런식으로 무람없이 여기저기 뒤적이며 해찰을 하곤 합니다.

모든 것을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은 분명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빨리 감기로만 보는 사람’이란 ‘모든 것을(치킨이나 케이크마저도) 후루룩대며 먹는 사람’ 만큼이나 상상 속의 존재 아닐까요.

✏️

“맛을 음미하며 먹어야 하는 책도 있지만, 들자마자 곧장 삼켜 버려도 상관없는 책도 있다. 그리고 비록 수는 적지만 이리저리 잘 씹어서 확실히 소화시켜야만 하는 책도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

【4.관광객, 무위도식자, 산책자】

‘지금의 콘텐츠 상황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콘텐츠는 셀 수 없이 많아져서 눈이 빙빙 돌지만 정작 내가 사랑할만한 콘텐츠 감상 경험은 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내 감상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좋은 작품이 적어진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산책자 생리학>(1841, 루이 후아르트)은 제목 그대로 산책자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오늘날 ‘콘텐츠 정글’을 헤매는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운 해찰 거리를 주는 책입니다.

<fig.5> <산책자 생리학>(1841)의 표지 삽화(왼쪽) / 잘 차려입은 신사가 지나가는 마차 때문에 옷에 오물이 튀거나 비를 쫄딱 맞는 장면을 풍자한 그림입니다. Goodreads, Metropolitan museum of art

<산책자 생리학>은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 파리 거리 풍경을 풍자한 익살맞은 글인데요.

우리는 보통 ‘산책’이라고 하면 뭔가 고즈넉한 숲 속 오솔길을 유유자적하게 걷는 장면을 떠올리곤 하지만, 19세기 중반 파리의 ‘산책’ 풍경은 그야말로 정글 수준의 난장판이었습니다. 오물이 여기저기 고여 있고, 시시때때로 사람들이 와서 부딪히고, 양아치와 거렁뱅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새로 생겨난 최신식 가게들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진기한 상품들이 잔뜩 모여있었습니다.

당시엔 집에 있어봤자 TV며 스마트폰 같은 게 없었기 때문에 아주 심심했을 겁니다. 어쩌면 그 시대의 ‘거리 산책’이야말로 ‘시간을 때울 거리, 볼 거리가 가득한 19세기 버전 OTT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거리에만 나서도 온갖 진기한 물건이며 싸움 구경, 관광객들을 관람(?)하며 시간을 때울 수 있었으니까요.

오늘날 누구나 영상 등 콘텐츠를 보며 시간을 보내듯, 19세기 중반 파리 사람들은 누구나 거리에서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만일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면, 그 이유는 산책할 줄 알기 때문이다[…]인간이 창조의 왕이 된 것은, 온갖 날씨와 기후에도, 또 가능한 계절이면 어느 때든 나가서 자신의 시간과 청춘을 잃어버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두 발 달린 깃털 없는 자, 그리고 외투 입고 담배 피우며, 산책하는 자다.“
-루이 후아르트, <산책자 생리학>(이하 동일)

이 책 속 산책하는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무위도식자’ ‘관광객’ ‘산책자’)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우선 ‘무위도식자‘는 일단 볼 거리가 있으면 무조건 죽치고 앉아 한참 시간만 때우는 부류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풍경이 가치가 있는지, 어떤 흥미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 등에 대한 자기만의 취향이나 감각이 없습니다. 그저 인기있다고 하면, 눈 앞에 있으면 영상을 틀어놓고 되는대로 시간만 죽이며 쳐다보는 사람에 비유할 수 있겠죠.

이런 사람들은 꽤 느긋하긴 하지만, 좋은 감상자라고 하긴 어려울 겁니다.

무위도식자와 산책자의 차이는 탐식가와 미식가의 차이만큼 크다[...]만일 싸움이 30분 연장되면 그도 30분 더 있게 될 것이다. 싸움이 그닥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아도 아무튼 이 무위도식자는 줄창 거기 있게 될 것이다[...]무위도식자가 검은머리방울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는 비극적인 장면을 목격했다고 가정해보자. 누군가 그 새를 새장에다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다 생긴 일이겠지만, 무위도식자는 그걸 보느라 오후를 다쓴다. 영리한 산책자는 이를 15분 정도만 진지하게 바라본다[...]무위도식자는 이 검은머리방울새가 새장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자기도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로 ‘관광객’은 무위도식자와 반대로 아주 성급한 사람들입니다. 권위있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풍경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빨리 감기’식으로 휙휙 지나치는 사람들이죠. 아래는 저자가 관광객의 ‘산책’을 묘사한 대목인데요. 오늘날의 ‘효율적인’ 관광객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파리 지도가 인쇄된 손수건을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미로같은 파리 골목을 헤맬까 봐 5분마다 지도를 꺼내 확인한다[…]’오늘은 기념물 열한 개를 볼 거야’[…]기념비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눈을 들어올려 원기둥과 그 밖의 몇몇 장식물을 본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유적이니 5분 정도는 투자한다. 여행 안내서에 적힌 설명을 읽는 데 4분 걸린다[…]이제 다른 기념비로 향한다. 그 앞에 가서 또 여행 안내서를 읽는다.

관광객과 무위도식자는 얼핏 보기엔 ‘정반대(촐싹쟁이와 느림보)’인 것 같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결국 자신의 취향이나 주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책자’도 마찬가지로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이들의 특징은 딱히 목적 없이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끄는 것에는 (그게 쓸모있든 쓸모없든) 제대로 신경을 쏟아 즐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루이 후아르트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산책자’들의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쁜 인간은 보지 않고 살펴보고, 무위도식자는 살펴보지 않고 보고, 산책자는 보고 살펴본다[…]진정한 산책자는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 아니면 초유동 과학 같은 것은 몰라도 된다. 대신 모든 길을 알아야 한다. 파리의 모든 상점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어떤 모자 가게에서 어떤 예쁜 모자를 파는지, 어떤 정육점에서 어떤 맛있는 고기를 파는지, 어떤 카페에서 어떤 맛있는 레모네이드를 파는지 등은 알아야 한다. 마술꾼, 요술꾼, 호객꾼, 노점상, 점포상 등을 꿰고 있어야 한다. 파리 수도의 광고 벽보라면 거의 다 외우고 있어야 한다[...]진열창에 적힌 외국어도 다 읽는다[…]산책자는 명민한 교양인이다. 적어도 바보는 아니다. 바보도 돌아는 다닌다. 그러나 절대 산책은 아니다.

저는 여기서 ‘보고 살펴본다’는 것을 ‘빨리 감기(훑어보기)’와 ‘느리게 보기(응시)’라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산책자는 제멋대로 훑어보다가도 때로 자신의 마음에 와닿은 것은 골똘히 응시도 합니다.

이런 ‘산책자’들에게 필요한 자질엔 사실 딱히 거창한 것이 없습니다. 대략 이런 것들입니다.

✏️

어떤 경우에나 명랑할 것.
필요할 때는 성찰할 것.
항상 관찰 정신을 지닐 것.
독창성은 그닥 없어도 됨.
유연한 사유.
약간의 피로와 훈련.
특히, 자신을 쉬게 할 줄 아는 의식 상태.

【5.맺음말】

그간 인스피아를 오래 읽어오신 분이라면, 아마 오늘 다룬 것과 비슷한 주제를 이전에도 몇 번 다뤘던 것이 떠오르실 것 같습니다.

볼 것이 너무나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안 본 콘텐츠’에 대한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을지(💌), 관심경제에서 어떻게 마음을 지켜낼지(💌), 선택지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등입니다.

회차마다 주목하는 포인트들은 조금씩 달랐는데요. 줄곧 이런 이슈들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콘텐츠 업계’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삶과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콘텐츠들을 단지 ‘가성비’라든가 ‘의무감’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때, 눈길을 끄는 싸움과 광고와 상점들이 즐비한 가운데서도 내게 의미있는 ‘영감’(꼭 쓸모있는 게 아니더라도)을 찾아볼 때. 때론 빨리 감기로 훑어보다가도 필요한 경우엔 부담없이 마음이 머무르게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에도 유쾌한 산책자의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저의 때론 번잡하고 때론 대책없이 느긋한 - ‘보고 살펴보기’는 현재 진행형에 있습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이나다 도요시, 황미숙 옮김,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현대지성, 2022.

-저자가 한 매체에 게재한 칼럼이 큰 호응을 얻으면서 추가 조사, 취재를 통해 출간한 책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콘텐츠를 둘러싼 현재진행형의 장면을 두루 보여주는 간결하고 뜨거운 책입니다. 제목은 <영화를 빨리감기로 보는 사람들>이지만, 책에선 단지 '빨리감기 습관' 뿐 아니라 전반적인 콘텐츠 소비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콘텐츠에서 '지뢰(고구마)'를 원하지 않는 습성, 은유보다는 직설적인 자막/대사에 의존하는 콘텐츠, 평론 권위의 실추 등을 두루 다룹니다.

특히 오늘 레터에선 서두에 잠깐 쓰고 말았지만 '큐레이션(콘텐츠 소개)'과 '저작권'이라는 문제는 저 역시 인스피아를 기획하고 쓰는 내내 고민해왔던 주제기 때문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정식으로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 박상준 옮김, 『화씨 451』, 황금가지, 2009.

-모든 책을 불태우는 디스토피아 세계를 기반으로 한 SF 소설입니다. 이 책에서 'TV'는 그야말로 '바보상자' '마약'인데요. 1950년대에 나온 책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라디오 귀마개(블루투스 이어폰)'나 '벽면 TV' '쌍방향 무전기(핸드폰)' 등 오늘날 일상적으로 구현된 기술들도 보여 흥미롭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고전입니다. 저는 특히 '사람들을 마비시키는 콘텐츠(=TV쇼 등 정부에 의해 권장되는 콘텐츠)'와 '불태워지는 콘텐츠(=어떤 종류의 책)'의 차이에 신경을 쓰며 읽었습니다.

한편 최근 이 책은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에 한 짤방을 올리면서 새삼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링크·'검열 디스토피아 삼대장'-1984, 멋진 신세계, 화씨 451)

루이 후아르트, 류재화 옮김, 『산책자 생리학』, 페이퍼로드, 2022.

-페이퍼로드 출판사의 '생리학' 시리즈 중 한권입니다. 오늘날 읽어도 웃음이 나오는 유쾌한 글입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콘텐츠 쪽과 연결지으려는 생각을 해보진 못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전 관심경제 회차에서도 '길 잃기' '걷기'를 콘텐츠 소비와 연결지은 적이 있더라고요(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링크).

이 책을 해찰하면서, 어쩌면 당대 거리의 풍경 역시 콘텐츠 세계와 어느정도 연결점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뭔가를 쳐다보면 광고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듯, 버스에 앉아서 멍 때리려고 해도 하늘에 광고 스티커가 날아다니는 세상이니까요.(링크) ("지금 심심하세요? 월 XX원이면 이 모든 콘텐츠가 무제한!")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내게 영화를 보여주러' 극장에 간다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1900자

🖍글 속 한 문장

우리는 왜 극장에 가는가. 나는 나에게 영화를 보여주러 간다. 나는 어떤 영화를 보기 어려워한다. 세계를 똑바로 보게 하고, 마음을 힘들게 하고, 눈물이 나게 하고, 눈물이나 흘리고 마는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영화들. 머리는 그것을 봐야 한다고 말하는데 몸은 핑계를 대며 미룬다. 그럴 때 나는 나 자신을 데리고 극장에 가야 한다. 끝까지 보기 위해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에 대해 쓴 칼럼입니다. '나에게 영화를 보여준다'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나아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어떻게 현실 인식과 연결이 되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뢰’ 없는 ‘사이다’만 원해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1700자

🖍글 속 한 문장

‘상쾌한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콘텐츠 소비의 ‘가성비’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유한한 자원을 써야 하는데, 굳이 불편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내는 데 가뜩이나 힘든 일이 많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가성비’는 절대 법칙으로 자리 잡았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것이 생존 법칙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빨리 감기> 책에도 자신에게 불편한 '지뢰' 요소가 있으면 아예 보지 않는 소비자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동화 <콩쥐 팥쥐>에서 콩쥐가 팥쥐에게 괴롭힘당하는 장면을 못 견디고 평점 테러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결국 문제가 해결되고 콩쥐가 행복하게 되는 것은 논외의 문제입니다. 이런 태도는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굳이 들으려고 하지 않는 태도로 연결됩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영화관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2200자

🖍글 속 한 문장

그런데 왜 영화관이었을까.“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함께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랐어요.[...]영화는 매주 상영작이 나오는데다 동네 주민들이 쉽게 모여 편하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봤어요. 동네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에 가장 어울리는 콘텐츠가 영화이고, 영화가 이곳의 근간을 담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2021년 한창 팬데믹이 기승을 떨칠 때 연희동에 39석짜리 '단관 예술영화' 공간 라이카시네마를 연 이한재 SPDG 대표 인터뷰입니다. 누구나, 언제나 쉽게 올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영화관을 선택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OTT에서 다시 TV로...‘오래된 미래’?

영문

🖍글 속 한 문장

더 많은 경쟁자가 등장함에 따라 일부는 TV와 같은 출시 일정을 택했다. Apple은 몇 개의 에피소드로 시리즈를 소개하고 일주일에 하나씩 출시하는 쪽을 선호한다...10년 전 넷플릭스는 현재 우리의 스트리밍에 대한 관념을 정립했다. 넷플릭스의 다음 행보는 아마도 다시금 TV로 전환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뉴욕타임즈 TV평론가가 넷플릭스 신규 드라마 시리즈에 대한 평을 합니다. 단순히 특정 작품에 대한 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간의 혁신 시도 및 최근 콘텐츠 제작 및 유통 지형 변화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간 약 10년 간 콘텐츠 트렌드가 TV에서 OTT로 바뀌어왔다면, 다시금 'TV'로 '진화'하는 듯 보이는 - 그 경계를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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