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평론가는 ‘내게 (어려운)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극장에 간다고 말했습니다.(링크)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내가 보기 어려워하는 종류의 영화들을 끝까지 버티고 보기 위해서죠.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분명 그런 영화를 집에서 과자를 먹으며 보고 있었다면 금세 멈춤을 누르고 “기분 다운되는데 다른 거 보자!”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관에선 아무리 진절머리가 나든 분통이 터지든 일단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도 강제로 스스로를 앉혀두지 않으면 도저히 보지 않을 것 같은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가곤 합니다. 

그런데 지난 회차를 쓰고 나서 문득 생각해봤습니다.

‘어려운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면 되지만, 그렇다면 어려운 책은 어떠한가?’

‘나는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왔나? 아니 애초에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해 시도를 하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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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각별히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해선 각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영화를 보러는 영화관에 가는 방법이 있어도, 일상에서 ‘각잡고’ 어려운 책 읽을 준비를 하는 건 꽤 난감한 일입니다.

책을 읽다가 조금만 어렵다 싶으면 ‘끄는’ 데는 1초도 안걸리니까요. 유튜브가 건너뛰기 때문에 감상에 좋지 않다고들 하지만, 책이야말로 수천년 이전부터 빨리 감기와 멈춤(책 덮기 혹은 내던지기), 건너 뛰기에 특화된 매체였습니다. 저 역시 책을 읽다가도 자주 딴짓을 하고 한눈을 팝니다.

그렇다면 문득, ‘어려운 책’이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왜 굳이 피곤하고 집중하기도 난감한데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할까요?

‘어렵다’는 것엔 여러 의미가 있을 텐데요. 일단 저는 ‘어렵지만 내가 읽고 싶은, 읽어야 하는 책’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접해보지 않은 낯선 분야의,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작가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만큼 독자도 정성을 쏟아 문을 두드려야 조용히 입을 여는 책 - 하지만 내가 정성을 들인만큼 독특하고 깊은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은, 대체로 꿀떡꿀떡 넘어가진 않습니다.

독서를 좋아한다는 애호가들이라고 해도 흔히 몇권을 읽었는지를 기준으로 스스로 ‘성과’를 체크하곤 합니다. 그렇게 권수가 기준이 되다보면 당연히 ‘가성비’가 안맞는 책들은 논외가 되곤 합니다. 만약 한달에 다섯권 읽기가 목표인데 그중 하나가 단테의 <신곡> 같은 것이어선 곤란하니까요. 그렇게 ‘책을 읽는다’는 행동이나 권수에만 집중하다 보면, 내게 편한 책을 많이 읽긴 읽어도 정작 어려운 책을 분투하며 읽긴 어려워집니다.

이 때문에 ‘지의 거인’이란 별명이 붙었던 일본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1940~2021)는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다니던 주간문춘에 사표를 냅니다. 그런데 정작 그는 기사를 쓰느라 거의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책을 보던 차였습니다. 젊은 시절 책을 하도 사모으느라 사는 집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였고요. 그런 사람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사표를 쓰다니?’라는 궁금증이 듭니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진짜 읽고 싶은 (어려운)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전설로 남았던 그의 ‘퇴사의 변’ 일부를 인용해봅니다.

“점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읽어치우지 못하게 되었다[…]읽고 싶은데 읽지는 못하는 책들이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것을 매일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심한 고통이었다.” “내가 정말 읽고 싶은 책은[…](읽는데) 열흘 걸리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달 걸리는 것도 있다.”-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되는 100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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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어려운 책을 깊게 읽는 것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곤 합니다.

적은 책을 천천히 읽는 독서가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3년에 작가 한명의 작품을 탐독합니다. 그의 독서론을 살펴볼 수 있는 <읽는 인간>에서 그는 제대로 된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작품을 한 편씩 쓴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요. 그는 주변 후배 작가들에게 글이 써지지 않으면 번역을 해보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번역이야말로 천천히 읽기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요.

‘낯선 책’ 역시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나이가 들고 자신의 전문분야가 굳어질수록, 다른 분야의 서적을 선뜻 읽기는 어려우니까요.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책 <목소리를 보았네Seeing Voices>는 그가 청각장애에 관한 한권의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아 시작된 기획인데요. 이 책 전체가 어찌보면 자신에게 낯선 분야의 어려운 책들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읽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적극적인 독서와 배움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그 열의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그로스의 책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책을 다 읽자마자 칫솔 하나와 녹음기와 카메라만 들고는 차에 올라탔다. 이 마법의 섬을 꼭 내눈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올리버 색스, <목소리를 보았네>

SF 작가인 테드 창은 반드시 집필 후기를 상세하게 씁니다. 그는 책 속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대목은 인상적입니다.

“두번째 영감은 로저 펜로즈가 <황제의 새로운 마음>에서 엔트로피에 관해 논한 대목에서 얻었다. 펜로즈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이 그 음식에 포함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틀렸다고 지적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에너지가 생성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은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과 거의 같은 비율로 끊임없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펜로즈의 설명을 읽을 때까지는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그 아이디어를 소설의 형태로 전달하고 싶었다.” -테드 창, <숨> 중 집필후기

이런 책들은 만약 단순히 ‘오백권’ ‘천권’을 읽어치우는 것에 급급했다면 나올 수 없는 기획이죠. 올리버 색스가 자기의 전문분야인 ‘정신의학’에 대한 책만 읽었다면 저런 책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고요. 테드 창이 ‘SF 잘 쓰는 법’이라든지 ‘SF에 대한 책’만 읽었다면 저런 영감을 얻을 수 있을리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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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피아를 처음 시작 했을 때엔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의도적으로 내게 어렵고 낯선 책을 읽어보고 싶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안읽을 것 같은 책들 말이죠. 예를 들어 테슬라에 대한 책이나, 재난에 대한 책, 일본 19세기 르포, 예술사책 같은 것은 제가 평소에 보지 않았을 - 그닥 제게 친숙한 주제의 책들이 아닙니다.

그간 다양한 책을 해찰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아무리 낯선 분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내 품 속에 ‘질문’이 있는 이상, 반드시 내게 와닿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어쩌면 가장 반짝거리고 재밌는 내용은 - 음악책을 읽으면서 AI에 대해 생각할 때, 예술사 책을 읽으면서 NFT에 대해 생각할 때, SF소설을 읽으며 정치에 대해 생각할 때 나왔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저는 해찰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꼭 학자나 작가가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질문에 대한 답, 참신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선 때로 내게 어렵고 낯선 책을 가끔은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학자도 작가도 아닌, 미디어 업계에 종사하는 일개 해찰꾼이고요.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남들이 다 보는 책, 큐레이션 요약본, ‘영감을 위한 영감책’을 똑같이 봐서는 새로운 생각을 하긴 어려우니까요. 밀도가 높고 어려운 책을 어떻게 자기만의 방법으로 격파해내는지, 그리고 그 분투의 과정에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영감이 나온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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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나의 나무 아래서>라는 에세이집에 수록된 한 편의 글(‘책을 읽는 나무의 집’)에서 어릴적 자신만의 독특한 어려운 책 독서법을 소개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 왠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고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좀체 집중해서 계속 읽을 수 없는 ‘어려운 책’들을 따로 상자에 모아뒀다가, 이것들을 읽기 위해 커다란 나무 위에 얼기설기 판자를 깔아둔 ‘나무 집’에 이런 책을 가져가 읽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제게 있어서 인스피아는 어려운 책을 읽고 싶어서 굳이 기어오르는 오두막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구자님도 연구자님만의 오두막, 혹은 읽고 싶은 ‘나만의 어려운 책’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연초가 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