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어떻게 23년이나 집권했을까?

2022. 3. 8.

푸틴은 어떻게 23년이나 집권했을까?

Vladimir Putin and media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31), 2022.3.9,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웹에서 보기 Web link

키워드: 푸티니즘, 러시아, 유라시아주의, 선전선동, 구세주

1.머리말

2.불곰을 타고 온 구세주 #이미지정치

3.상처 입은 피해자, 러시아 #순결주의

4.‘아무말대잔치’가 만든 진짜 현실 #가짜뉴스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역대급 사전투표율(36.9%)을 기록했기 때문에 연구자님들 가운데서도 미리 투표를 하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주에 사전투표를 하고 왔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최근 한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우크라이나에 사는 가족, 친척들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내용이었는데요. (기사) 이 기사에서 키이우에 거주하고 있는 33세 남성은 호소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고, 아들이 여기 있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전화 한통 안하셨다고요!”

러시아에 사는 그의 부모님은 심지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죠. 현재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넘치도록 많습니다.

이는 러시아 방송이 우크라이나 현실을 전하지 않고, 정부 입장만 전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방송은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키이우 등의 장면을 다루지 않습니다. 대신 러시아 뉴스는 우크라이나군이 “민간인과 러시아군에 대한 도발 행위의 일환으로 주택가에 대한 포격과 암모니아를 활용한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기사)

심지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반나치 투쟁(!)”이나 마찬가지란 주장까지 나오고 있죠. 한참을 미간을 찌푸려야 겨우 이해가 될까말까한(‘이해’가 돼도 ‘이해’는 안되는) 선동들이 많습니다. 한편 우크라이나 상황을 제대로 전한 독립 언론은 ‘가짜 뉴스’를 퍼뜨렸다며 접속이 차단됐습니다.

<fig.1> 러시아 채널원에서 2014년 당시 탱크의 폐허에 우크라이나측이 사진을 합성해서 ‘Z’라는 글자를 써넣었다며 가짜뉴스라고 주장하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습니다.(왼쪽) 우크라이나 포격 상황을 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뉴스 채널원, AFP

이런 황당한 일이 가능한 것은 푸틴 정권의 언론 장악 역사가 유구하기 때문입니다. ‘뉴스 중독자’로 유명한 푸틴은 집권 이후 꾸준히 언론 장악 의지를 보이며 국가의 가치에 반하는 언론들을 교묘하게 탄압해왔습니다. (기사)

정부가 미디어를 통제하고, 미디어가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 올해로 23년차1) 푸틴 정권의 통치 방식입니다.

2022년 러시아 TV에선 ‘반나치 투쟁’을 하는 용맹한 러시아 해방군의 이미지와 함께, 평소와 마찬가지로 당당한 푸틴의 지도자 이미지를 보여줍니다. 그곳에 폭탄으로 쑥대밭이 되어버린 우크라이나의 도시와 가족이 죽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슬픔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이번 레터에서는 마르가레타 몸젠 <푸틴 신디케이트>, 월터 라쿼 <푸티니즘>,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등을 지팡이 삼아 푸틴 정권과 우크라이나 침공을 ‘미디어’와 연결지어 해찰해볼까 합니다.

관련해 세가지 키워드를 꼽아보았습니다. (#이미지정치 #순결주의 #가짜뉴스)

1)대통령 3선을 금하고 있던 당시 러시아 헌법 때문에 어쩔수없이 잠깐 '자리바꿈'을 했지만, 사실상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던 메드베데프 대통령 정부(2008~12)에서 총리로 재직했던 기간을 포함합니다. 푸틴은 2020년 또 한차례의 개헌을 통해 2036년까지 대통령 연임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2.불곰을 타고 온 구세주 #이미지정치】

푸틴이 웃통을 벗고서 말을 타고, 전문가처럼 사격을 하고, 얼음물에 수영을 하는 사진 등을 한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와일드한 이미지 뿐 아니라 강아지를 쓰다듬고 어린아이의 눈을 맞추는 ‘부드러운’ 지도자로서의 푸틴의 모습도 부각돼왔죠.

<fig.2> 상의를 탈의한 채 말에 타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이미지(왼쪽). 해당 이미지는 밈이 되어 불곰이나 돌고래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패러디되고 피규어까지(...)나오기도 했습니다. 오른쪽은 미국언론 VOX가 푸틴의 이미지 정치의 핵심 메시지를 정리한 문구입니다. "러시아여 걱정말라. 푸틴은 건강하니까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출처 Getty image, VOX

통상 정치인들이 사람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긍정적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어느정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푸틴의 경우 이런 ‘이미지 만들기’가 국가 정체성을 옹호하는 핵심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또한 푸틴의 이미지는 국가 차원에서 공영 방송, 크렘린 스핀닥터들의 체계적인 계획으로 이뤄져왔다는 점에서 많은 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죠.

마르가레타 몸젠의 <푸틴 신디케이트>는 ‘푸틴 시스템’을 가능케 한 러시아 특유의 미디어, 정치에 주목한 책입니다. 신디케이트란 끈끈한 카르텔을 의미하는데요. 저자는 이책에서 소련 해체(1991) 이후 어떻게 올리가르히, 실로비키 등의 카르텔이 ‘러시아식 주권 민주주의’2)를 만들어왔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푸틴의 권력이 철저히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짚고 있는 것입니다.

푸틴은 새로운 국가 지도자로서 TV 채널 화면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무엇보다도 대중매체에서 강조한 캅카스산맥의 장군 역할 덕분에 인기가 높아졌다. 앤드류 윌슨과 미하일 지가르에 의하면 푸틴은 그저 가상의 정치 지도자였다. 정치기술자, 언론인 그리고 옐친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저명한 저널리스트인 레어니드 파르페노프는 푸틴에 대해 순수한 창작품이자, 스핀닥터들과 크렘린궁이 조종하는 언론인들의 집단적인 상품이라고 말했다.

-마르가레타 몸젠, <푸틴 신디케이트>(이하 동일·강조는 원문)

몸젠은 옐친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기’ 전의 푸틴을 “무에서 시작한 남자”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누구도 ‘KGB 출신의 조용하고 작은 체구의 남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요. 옐친은 그가 당시 인기가 높던 젊은 영화배우를 닮았고, 젊고 건강하며, 적당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명의 푸틴을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습니다.

처음에 푸틴은 인기가 정말로 없었습니다. 당시 여론은 무색무취한 젊은 푸틴을 두고 “말린 상어 정도의 매력을 가진 남자” “눈에 띄지 않는 관료” 등 혹평을 했는데요. 체첸 테러 대응과 관련해 TV에 출연해 강경한 이미지를 보이면서 그는 순식간에 지지율 1%에서 50%를 돌파하고, 이듬해 러시아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대통령 선출 이후 푸틴은 TV에 굉장히 집착하면서, 집권 1년도 안되어 공영방송을 휘어잡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조그만 쥐처럼 묘사한 방송을 금지하는 등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훌륭한 지도자로서의 영웅적인 모습을 계속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갑니다. 이에 보리스 그리즐로프 의원은 “푸틴이 곧 러시아”라고 말하기도 하고, 러시아의 한 기자는 푸틴에 대해 “러시아의 제임스 본드”라고 합니다.

TV 속 완벽하고 멋진 지도자의 이미지를 보며 러시아인들은 안도, 신뢰감을 느꼈다고 하네요.

강한 의지를 가진 지도자, 현대적 사령관, 승리가 보장된 애국주의자, 카리스마 있는 구원자, 독실한 차르이자 군주[...]다재다능하고 용맹한 스포츠인이다. 그는 유도인 수영인, 아이스하키 선수처럼 보이게 하거나 위풍당당하게 상체를 노출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의도했던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이미지 연출을 통한 권력과 힘이 표출되고[...]동물애호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싸 배려심있는 보호자 역할 등의 이미지가 드러난다[...]푸틴은 영웅적인 야성적 남자 뿐만 아니라 예술가, 화가, 가수, 피아노 연주자, 심지어 스타로 연출되었다.

이미지는 단지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 독재를 정당화하고 독재 정권의 불법을 가리는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지도자 푸틴의 만들어진 이미지에 열광하는 동안 이면에서는 그의 정적이었던 보리스 넴초프, 홀로 탈세 부패 정권에 맞서 싸운 변호사 세르게이 마그니츠키, 전직 정보요원으로 푸틴 정권을 비판하다 폴로늄이 든 차를 마신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등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fig.3> 드미트리 브루벨과 빅토리아 티모폐에바가 그린 벽화 <2007>. 사격하는 푸틴의 연출된 이미지 뒤로 그에 의해 희생된 이들(호도르콥스키, 리트비넨코 등)의 그림이 있습니다. 출처 VOA/James Brooke

몸젠에 따르면 2014년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 이후, 크림반도 ‘탈환’을 통해 러시아 내에서 푸틴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는데요. “빛나는 지휘관”으로서의 이미지가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푸틴의 지지율이 괄목할만큼 올랐던 집권 초중반 세 포인트를 꼽는다면 2000년(체첸), 2008년(조지아), 2014년(우크라이나)이 있는데 이는 모두 전쟁과 관련된 해였죠.

국민들이 “빛나는 지휘관” 푸틴에 열광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무에서 시작한 남자' 푸틴은 이미지 정치를 등에 업고서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2)'주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러시아의 홍보전문가 블라디슬라프 수르코프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민주주의가치보다 '통치자 주권'이 더 중요하다는 묘한 이 개념은 푸틴 정권의 특징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보여주는 단어이죠.

【3.상처입은 피해자, 러시아 #순결주의】

“2014년 이후 집권한 우크라이나 정권 자체의 공격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2014년 쿠데타의 산물이며 폭력, 유혈, 무법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돈바스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내지 못했거나 하지 않았다[...]키예프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대행위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한다.”

위의 문장을 읽다보면 대체 누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쏭달쏭하실텐데요. 참고로 이 말은 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작전’ 개시를 선언한 푸틴의 연설 중 일부 대목을 발췌한 것입니다.

푸틴의 말을 따라가다보면, 마치 러시아가 ‘순진한 피해자’고 서방, 우크라이나인들이 ‘가해자’인것 같은 언급들이 이어지죠. 푸틴의 이런 엉뚱해보이는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 이면의 ‘러시아 순결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사상가 이반 일린(Ivan Ilyin, 1883~1954)은 ‘러시아 순결주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푸틴이 ‘제일 좋아하는 역사가’로 꼽기도 하고, 그간 각종 연설에서 여러번 인용해온 학자인데요.

일린이 말하는 ‘러시아 순결주의’의 핵심은 러시아가 “흠없이 순결하고 완전한” 민족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독립된 국가가 아니고 러시아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러시아에겐 ‘모욕’이 됩니다.

이런 이반 일린의 사상에 대해 미국 역사가 티머시 스나이더는 ‘영원의 정치학’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가치가 ‘우리’만의 전유물이라는 ‘닫힌 사상’ 안에선 ‘우리’는 항상 아무 잘못이 없으며,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일 뿐입니다. 이 때문에 ‘선제 공격’은 곧 ‘자기 방어’가 됩니다.

러시아는 언제나 유럽 ‘대륙 봉쇄’의 희생자였다. 일린의 시각에서 보면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한 이래 러시아 민족은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역사적 고난을 겪었다” 러시아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오로지 부당한 대우만을 받을 뿐이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고 책임은 사라진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이런 ‘러시아 순결주의’는 ‘서방’이라는 커다란 바깥의 적을 만들며 무럭무럭 자라나왔습니다. 이반 일린의 사상은 훗날 알렉산드르 두긴 등 러시아 극우 사상가들의 ‘신유라시아주의’와도 이어지는데요. 유럽-서구에 맞서 제국으로서의 러시아의 영광, 영향력을 확장해가야 한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fig.4> 러시아의 사상가 이반 일린을 그린 그림, llyin, Mikhail Nesterov(1921)(왼쪽)과 현대 극우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 출처 위키피디아, 위키미디어

미국의 러시아 전문가 월터 라쿼는 <푸티니즘>에서 ‘새로운 러시아의 사상 기둥들’ 중 하나로 유라시아주의를 꼽고 있는데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에서 유라시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부분을 여러번 읽었는데도 유라시아주의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월터 라쿼는 그런 반응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도 짚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는 결코 아시아 가치의 재발견이나 매력을 이야기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현대에 들어 유라시아 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딱히 논리를 지닌 ‘사상’으로서 유라시아주의를 주장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러시아 제국의 이상을 장식할만한 ‘적당한’ 도구가 필요했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파시즘은 비록 그럴싸하게 보이는 겉옷을 걸쳤더라도 그다지 훌륭한 이념은 아니었다. 그리고 재래식 보수주의는[...]따분하기까지 했다[...]이런 상황에서 유라시아주의는 현저히 적당하게 보이는 이념노선으로서 재발견되었다. 그것은 애국적이고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이며 국가주의적인 이념이었다[...]그것은 난해한 정치적 견해들과 세계관들을 국민과 집단들에게 보급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모호했다. 그리하여 갑자기 모든 러시아인이 유라시아주의를 발견했다.

-월터 라쿼, <푸티니즘>

유라시아주의에선 극좌와 극우, 혹은 이런저런 사상들이 ‘악마같은 서방에 맞서는, 순결한 러시아의 영광’ 아래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최근 푸틴의 우크라이나 공격 개시 연설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4.‘아무말대잔치’가 만든 진짜현실 #가짜뉴스】

“그냥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 현실을 창조하라.-글렙 파블롭스키”

티머시 스나이더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가짜뉴스’의 첨예한 전장으로 2014년의 우크라이나를 소환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2014년 이후 현재까지 이어진 ‘돈바스 전쟁’은 온라인 전쟁과 오프라인 전쟁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전쟁’이라고 정의되기도 했는데요. 역사상 이처럼 전쟁 과정에서 ‘가짜뉴스’가 강력한 무기로 사용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푸틴 정권이 우크라이나 관련 이슈에 대해 시종일관 취했던 입장은 ‘그럴듯하지 않은 부인’입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한다면 보통 쭈뼛대거나 최소 ‘그럴듯해’ 보이기라도 하려고 애쓰기 마련인데, 그냥 뻔뻔하게 거짓말을 반복해버리는 것이죠. 거짓말하는 사람이 너무 당당하면 듣는 사람이 되레 할말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그 헛소리를 반복해서 듣다보면 그게 진실처럼 받아들여집니다. 푸틴이 노린 게 바로 그거죠.

예를 들어 2014년 2월 28일, 푸틴은 이미 4일 전부터 우크라이나에 파병 중이면서도 너무나도 당당하게 “우리는 무력으로 위협하고 크림반도에 병력을 보낼 의도가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군복을 입은 병사가 찍힌 사진이 발견되니 푸틴은 되레 기자에게 면박을 주며 ‘그럴듯하지 않은 부인’을 합니다. 사진에 찍힌 러시아 병사들의 정체는 ‘현지 상점에서 러시아 군복을 구입한 그 지역 우크라이나 시민들’이라는 거죠.

그해 3월 16일엔 크림반도 거주 시민들이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 관련 국민투표에 참여했는데요. 시민들은 ‘우크라이나냐 러시아냐’가 아닌 ‘나치냐 러시아냐’라는 선전에 맞닥뜨렸습니다.

<fig.5> 2014년 크림반도 합병 국민투표 당시 인근 지역에 세워졌던 투표 관련 광고 판넬. 크림반도를 '나치'에게 넘길 것인가, 러시아에 맡길 것인가라는 내용을 선전하고 있습니다. 출처 radio free europe radio liberty

이런 뭐가 뭔지 모를 엉뚱한 상황에서 프로파간다는 독버섯처럼 퍼져갑니다. 우크라이나 동부 친러 반군 사령관 블라디미르 안튜페예프는 이곳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러시아가 “유럽과 미국의 프리메이슨 세력”과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의 동맹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환호합니다. 영원의 정치가 만들어내는 서사는 ‘나는야 악에 맞서는 정의의 사도’라는 고양감을 주기 때문이죠.

푸틴은 거짓말이 러시아의 정치 계급을 분할하기는 커녕 오히려 통일시킨다고 제대로 가정했다. 더 크고 명백한 거짓을 말할수록 국민들은 거짓말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성을 보여주고, 크렘린 권력의 거대하고 신성한 수수께끼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티머시 스나이더,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문제는 이런 탈진실 상황이 현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모르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세계 사람들은 잘 몰랐습니다. 그해 5월 러시아에서 온 지원병들은 도네츠크 공항을 급습했다가 서른명 넘게 사망합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에서 “파시즘”과 “종족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러시아에 친구와 가족을 두고 떠나온 이들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최근 영문을 모르고 우크라이나 전장에 투입되었다가 깜짝 놀라고 좌절하는 러시아 병사들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어떤 장의사는 러시아 병사의 시신 접수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정부에 대한 도발로 비춰질까 걱정했기 때문이죠. (“이 사람은 전투에서 사망한 러시아 시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쟁 중이 아니잖아요!”)

읽다보면 어떤 대목에선 상당히 기시감이 들기도 하는데요. 실제로 저자는 이런 ‘러시아표 가짜 뉴스’ 선동이 이윽고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 트럼프 치하 미국 등으로 퍼져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맺음말】

최근 푸틴은 더 수위 높은 미디어 통제 선언을 했습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의 SNS 러시아 국내 접속을 차단하고, ‘가짜뉴스’ 유포에 최고 15년형 선고가 가능하도록 한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기사)

미디어가 발달하고, 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록 민주주의와 정치에 있어 미디어의 역할은 중요해집니다. '미디어'에 초점을 맞춘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 제목(<가짜 민주주의가 온다The road to unfreedom>)이 자유,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번 회차를 쓰면서 지난 레터 가운데 ‘탈진실 회차(위(기)를 보지 않기: 돈룩업과 탈진실)’(💬레터링크)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푸틴은 당당한 거짓말로 진실을 대체해버립니다. 미디어에는 거짓말만 넘쳐납니다. 푸틴의 거짓말 속에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나치’가 되고, 폭격으로 엉망이 된 우크라이나의 풍경은 ‘합성사진’이 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 결과 러시아 사람들은 이웃나라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이 죽음의 위험에 처해있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 공론장을 만드는 것은 곧 민주주의와 평화와 아주 밀접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탈진실을 방치하게 된다면 '가짜 민주주의'가 오고, 이는 폭정,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쁜 것은 탈진실이 우리가 폭력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이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법마저도 잊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최근 NYT에는 “우리는 ’라이브 방송 전쟁’에서 우리가 본 것들을 믿을 수 없다”는 제목의 흥미로운 칼럼 한편이 실렸습니다.(링크)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문가 Sophie Pinkham는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사진, 영상물의 약 70%정도가 조작된 것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짜 뉴스’는 꼭 러시아만의 것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 도심 폭격 상황이라는 설명이 붙은 한 영상은 2020년의 다른 지역 사진이었고, 러시아 병사에 용감하게 맞선 우크라이나 소녀의 모습은 사실 2012년 찍힌 젊은 팔레스타인 활동가의 사진이었죠. 최근엔 우크라이나의 선전 속 ‘가짜 영웅’들이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링크)

Jay Caspian Kang은 현재 우크라이나전을 둘러싼 서방의 '정의로운 가짜뉴스'에 대해서도 두 가지 곰곰 생각해볼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전쟁의 피해자에는 우크라이나인 뿐 아니라 러시아인도 존재한다.(하지만 서방의 고양된 가짜뉴스는 이를 간과하게 만들 수 있다)

둘째.과연 이라크전 때도 SNS가 있었다면 전세계인들은 ‘갈색 피부의 무슬림’의 아픔에 이만큼이나 공감, 지지했을까?

(아마도 그들의 현실은 알고리즘에 의해 ‘가짜 뉴스’로 걸러지거나, 아예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진실보다 ‘공감’이 중요한 미디어 생태계에선 정보의 경중, 진실성이 공감 가능성으로 대체될 수 있다.)

총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반군에게도 총이 필요합니다. 가짜뉴스를 활용하는 것도 현대전의 일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러시아가 벌이고 있는 인권유린, 폭력은 반드시 막아야만 합니다. 다만 SNS에서 고양된 영웅의 서사를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런 ‘거리두기’가 없다면 어느새 악은 거울 속에서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낼지 모릅니다.

최근 이런저런 ‘SNS 소식들’이 만들어내는 고양의 서사 속에 조금은 엉뚱하거나(기사) 불길한 징조들(기사)이 속속 보이는 것은 비단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마르가레타 몸젠, 이윤주 옮김, 『푸틴 신디케이트』, 한울, 2019.

-통상 '독재자'로서의 푸틴에 주목하곤 합니다만, 이 책은 '푸틴 시스템'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소 딱딱해보일 수 있는 책이지만 재치있는 인용과 적절한 굵은 글씨 사용, 소제목 등으로 인해 비교적 수월하고 즐겁게 읽어갈 수 있었던 책입니다. 다른 연구자들의 저작도 폭넓게 인용하고 있어 공부를 더 뻗어가기 좋은 책입니다. 오늘 다룬 다른 책들에 비해서 분량도 적은 편이니 푸틴 정권의 작동 방식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부담없이 일독을 권할만합니다.

월터 라쿼, 김성균 옮김, 『푸티니즘』, 바다출판사, 2017.

-수십년간 러시아를 연구해온 러시아 전문가의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푸틴'이라는 인물보다는 푸틴을 중심으로 한 사상-'푸티니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또한 후반부에서는 꽤 큰 비중으로 향후 전망, 러시아를 위협할만한 주요 요소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인구감소 문제와 이에 따른 외국인 수용의 문제였는데, '푸티니즘'의 폐쇄적인 러시아가 과연 외국인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푸티니즘'을 강요할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주변국(우크라이나 등)과의 관계에 대한 내용도 언급됩니다.

이 책의 특징적인 부분은 푸티니즘의 핵심 기둥 중 하나로 천연가스 가격 상승을 들고 있다는 점인데요. 이에 대해 '바람이 불어서 저절로 떨어진 열매(행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머시 스나이더, 유강은 옮김,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 부키, 2019.

-201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가짜뉴스'와 프로파간다를 어떻게 이용해왔는지, 이를 통해 어떻게 '가짜 민주주의(made in 러시아)'가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 선전선동에 기반한 가짜 민주주의는 이후 미국으로 퍼져가며 트럼프 시대를 열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얼핏 민주주의에 대한 책같지만(실제로 그렇지만), 전체 장 중 대부분이 러시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현재 상황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만한 책입니다.

스티븐 리 마이어스, 이기동 옮김, 『뉴 차르』, 프리뷰, 2016.

-모스크바 주재 기자 등을 역임하고 오랜기간 러시아 관련 취재를 해온 뉴욕타임즈 기자가 쓴 엄청난 분량의 블라디미르 푸틴 평전입니다. 푸틴의 정계 데뷔부터 집권 중반까지의 상황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밀도있는 주변 취재를 통해 적고 있습니다. 이번 레터를 쓰는 과정에서 세세한 팩트, 선후관계 등을 공부할 때 도움을 얻었습니다. 위의 책들 가운데 가장 가볍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책이니 '인간 푸틴'과 러시아 정치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글 속 한 문장🖍】

👤주제에 대해 더 읽을 만한 글들을 골랐습니다. 각 사진을 누르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푸틴의 시각으로 본 '포스트 냉전'

독서시간: 약 20분 / 글자수: 약 8000자

🖍글 속 한 문장

"푸틴 대통령의 연설은 ‘진실’과 ‘의도적 왜곡’을 모두 담고 있다[...]푸틴 대통령의 생각과 우크라이나 위기의 이해를 위해 A4용지 20장 분량의 원문을 4분의 1 분량으로 요약해 번역, 게재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지난주 레터에도 중간 링크 중 하나로 소개했었습니다만, 못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 다시 소개해봅니다. 푸틴 연설 내용을 직접적으로 다룬 경우는 거의 없는데, 단순 옮기는 것을 넘어 맥락 해설, 전문가 코멘트를 더했습니다. 오늘 레터를 읽고 이 기사를 읽으시면 행간이 잘 보일거라 생각됩니다.

러시아 ‘가짜뉴스’ 유포 15년형 선고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300자

🖍글 속 한 문장

“법안이 통과된 직후 BBC는 러시아에서 취재하던 자사 언론인 활동을 중단했다. BBC는 팀 데이비 사장은 “독립적 저널리즘 과정을 범죄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러시아가 자국에서 유통되는 '가짜뉴스' 유포자에 대해 최고 15년형을 선고한다고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진실을 취재해오던 해외 언론인들이 짐을 싸고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쟁이가 되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크라이나 침공과 일본 ‘핵 공유’ 논쟁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200자

🖍글 속 한 문장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할 수 있었다면 러시아의 침공은 아마 없었을 것.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지만 만일의 사태의 절차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며 (핵 공유 관련) 논의를 해야 한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일본에서 ‘핵 공유’ 논쟁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 자민당 의원들에 일본유신회까지 가담해 핵 공유 논쟁을 불지피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위기 상황은 일부 국가의 우파들 사이 군 강화, 핵 무장 등의 필요성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조지아, 시리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독서시간: 약 8분 / 글자수: 약 2000자

🖍글 속 한 문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조지아 때의 각본을 따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올 만큼, 2008년 8월 조지아 침공 당시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지아, 시리아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현재 러시아의 행보는 수년 전 이 국가들에서 했던 것과 많은 점에서 유사합니다. 위의 그림은 포격으로 인해 쑥대밭이 된 시리아의 한 마을에서 청년들이 그린 우크라이나 지지 벽화입니다.

지난 레터(“우크라이나의 아픔 : 대기근, 펭귄, 마이단”)등에 대해 보내주신 의견을 소개합니다. 오늘 레터를 읽고도 간단한 감상을 남겨주시면 다음 레터에 함께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구글독스에 남겨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은 레터 하단 Notion 피드백 페이지를 통해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공F맞은대학생 연구자님 : 아마 많은 분들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한반도 상황이 오버랩되어서 굉장히 공감되고 신경쓰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혼란한 정치상황으로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이고있는 상황이 어딘지 모르게 우크라이나 상황과 비슷해 보입니다.

최근 전쟁에 민간 기업들이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기술과 경제의 발전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느끼는 동시에 '디지털 노마드'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 기업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비록 예전보다야 영향력이 떨어졌으나 아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정부가 점점 힘을 잃어간다는 '디지털 노마드' 이론의 한 부분이 떠올랐는데, 현대의 대부분의 정부가 분명 예전보다 힘은 줄었지만 여전히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 전쟁은 미래 세계에서 기업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메타버스 세계에서의 새로운 국가가 바로 기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기업과 정부가 전면전을 치를지는 지켜봐야겠지만 말입니다.

☞김스피 says: 저도 지난주 레터를 쓰기 위해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알아보다 이런저런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가 나름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 것이겠죠. 전쟁과 기업 관련해서는 일단 '가짜뉴스' 이슈만 놓고 보아도 민간 플랫폼 기업의 위력이 굉장히 막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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