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인스피아 저널, (18), 2021.12.1,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남편 재임 중 고통받고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남편을 대신해 사죄를 드리고 싶다” 

지난달 27일, 전두환의 영결식에서 그의 아내는 대신 사과했습니다. 구체적인 목적어가 없는 이 짤막한 ‘대리 사과’는 역설적으로 어떤 사실을 강조합니다. 결국 전두환은 죽을 때까지 직접 사과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죽은 날 5.18 피해자 이광영씨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링크)

생전의 전두환은 ‘사과하지 않은’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늘어놓았습니다. 2017년 낸 회고록이 대표적인 예인데요. 총 3권으로 나온 그의 회고록 중 1권은 5.18 민주화운동 왜곡으로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저자 소개란에서 전두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1988년 2월 단임을 실천하고 퇴임함으로써 우리 헌정사에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세웠다” 이 밖에도 그는 사과는 커녕 뻔뻔하게 자신의 책임을 남탓으로 떠넘기는 등의 문제 발언들을 계속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간적인 면을 본다는 것은 어떤 걸 의미할까요? 

잘 쓰여진 전기는 한 사람의 입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칠의 전기 <처칠, 끝없는 투쟁>을 쓴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처칠과 히틀러의 공통점으로 "전쟁을 위해 태어났고 전쟁을 사랑한" 전사의 요소를 가졌다는 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극단적 경계"로 나아갔다는 점 등을 꼽았습니다. ‘붉은 독수리’ 등으로 불린 굳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말년에 감옥에 갇혀 작은 종다리의 울음 소리를 흉내내며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입체적인 접근이 꼭 “악인이든 위인이든 사람이라면 응당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로 ‘쌤쌤’을 만들어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저하게 과거를 분석하고 그 교훈을 현재에 적용하기 위해선 때로 역사라는 몸통을 흔들었던 인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나무 전 한겨레 기자의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은 ‘인간’ 전두환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전기입니다. 

저자는 많은 인터뷰와 문헌, 책 등을 통해 ‘공인’으로서의 전두환 이전의 모습을 끌어냅니다. 그는 말합니다. “전두환의 좌뇌에 레드 콤플렉스가 있다면, 우뇌에 엘리트주의가 있었다” 

저는 처음에 이 대목을 읽고서 ‘레드 콤플렉스는 그렇다 쳐도 엘리트주의라니?’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저자는 정치권에서 무명에 가깝던 전두환(육사 11기)이 현존하는 권력인 김종필(육사 8기)을 넘어 ‘하극상’을 할 수 있었던 명분이자 이유로 엘리트주의를 들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있는 자, 전두환>은 전두환만을 다룬 것은 아닙니다. 이책에는 전두환 말고도 수많은 ‘살아있는 자’들이 나옵니다. 이들 중 일부는 사망하기도 했지만 당시 전두환을 둘러싼 얼굴들이었던 이들이 만들어낸 자취는 여전히 ‘현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가 주목한 이들은 5공의 협력자보다도 그 주변의 반대자들이었는데요. 육사는 독재자들을 배출했지만, 조용한 반대자들 역시 길러냈습니다. 정병주, 이한림 등입니다. 육사 9기인 정병주는 5.16 쿠데타 당시 모의에 참가했다가 3일 전에 이탈하고 3개월 간 영창에 갇힌 뒤 한직으로 쫓겨났습니다. 이후 12.12 쿠데타에서도 쿠데타 세력에 맞섰다가 특전사령관실에서 총을 맞고 가까스로 죽음은 피한 채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1989년 3월 행방불명된지 130여일만에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군부 출신은 아니지만, ‘경제대통령’이라 불렸던 김재익은 독재 정권 하에서도 금융실명제 등의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이끌어낸 숨은 장본인입니다. 케인스주의자였던 그는 어려운 경제를 명쾌하게 설명해내는 능력을 가지고서 전두환의 ‘경제 선생님’을 맡았으며, 공정거래법과 금융실명제 도입의 숨은 공신이었습니다. 생전 김재익은 ‘군부에 부역한다’는 지식인 동료들의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김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 

이 밖에도 이 책의 저자는 전두환 권력의 안과 바깥에 있는 이들을 두루 넓게 만납니다. “인세 받아서 배를 하나 사려고” 했다는 전두환 전기를 쓴 소설가 천금성, 한때 한국형 르포르타주의 선구자로 불렸지만 현재는 ‘취재 대신 칼럼’만 쓰고 있는 조갑제를 만난 이야기 등에선 ‘부역자’라는 한 단어로 퉁칠 수 없는 삶의 복잡함을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책이 ‘살아있는 권력’의 중심부보다는 그 바깥의 이야기를 더 짚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이는 어느정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는 수많은 부역자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사유들을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살아있는 자’였던 전두환 역시 저자의 인터뷰를 거절하는데요. 거절의 이유는 “회고록이 나오기 전까지는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5.18은 불과 40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과 주변 인물들의 얼굴 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얼굴들이 있습니다. 

최정운 서울대 명예교수의 <오월의 사회과학>은 5월의 광주를 사회과학적 시각으로 풀어낸 책입니다. 사실 5월의 광주와 관련해 많은 피해자 진술 등을 담은 책, 콘텐츠들이 있지만 이 책을 함께 골라든 이유는 이 책이 그날 광주에 있던 많은 이들의 입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얼굴들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서문에서 5.18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의 사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렇게 적습니다. 

그간 우리는 진상규명을 부르짖으며 ‘사실’들에 매달려왔다[...]‘200명 죽었다’ ‘2000명 죽었다’ 등의 이야기는 사실 ‘one little Indian, two little Indian...’처럼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14시 30분, 금남로에 시위대 3000, 제봉로에 1500...’ 등의 경우는 높은 곳에서, 헬리콥터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시위를 진압하려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일 것이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중(이하 동일)

그날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노태우 사망을 알리는 속보가 떴습니다. 방금 전 서울광장에서 본 비현실적일만큼 커다란 박정희 영정과 그 앞에 운집해있던 사람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숨을 거둔 두명의 군인 출신 대통령이 떠오르며 가슴 한 구석이 묵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달이 채 자나지 않아 '살아있는 권력' 한명이 더 이 세상을 떴습니다.

-1999년에 처음 출판된 책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고전입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5월 광주 시민을 절대공동체라는 개념으로 해석했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상적인 공동체처럼 그려내진 않고, 드라이하게 그 안의 계급구도 정동 등을 포착해낸 책입니다. 어려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읽기 쉽게 쓰여져 있고 책이 많이 두텁지 않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맺음말에서 소개한 다큐멘터리 <김군>의 취재 과정 등을 담은 책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김군을 찾아서이지만, '김군'의 이름은 찾지 못한 대신 수많은 '김군들'에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인스피아도 어언 20회차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간 난민, 패럴림픽, 기아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었는데요. 

혹시 지난 회차 가운데서 '아, 이 회차에서 이 책(혹은 영화 등)을 다뤘었으면 좋았을텐데, 아깝다!'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지난 회차의 주제에 대한 책이라도 추천해주시면 검토 후 레터에서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왜 나는 폭식하는가 : 다이어트와 철학' 회차에서 다뤘으면 좋았을만한 책 = 선재스님,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신간도 구간도 상관 없습니다. 회차명과 책 이름, 그리고 짤막한 추천 이유를 적어서 아래 '💌편지 보내기' 버튼을 통해 보내주세요. 지난 회차의 레터 내용은 아카이브 페이지(💬링크)를 참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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