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김장하’를 찬양하기만 할 때 : 부와 관계 맺기

2025. 5. 20.

‘어른 김장하’를 찬양하기만 할 때 : 부와 관계 맺기

Where we stand : Class matters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56), 2025.5.21,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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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 상속자, 빈부격차, 고립, 계급, 호기심

1.머리말

2.그 성채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 <억만장자가 사는 법> #연결

3.아웃사이더가 만들어온 진보의 역사 : <캐비어 좌파의 역사> #욕망

4.이것은 모두의 문제다 : 나의 ‘자리’에서 ‘연결’ 되기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지난 4월,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 김장하>(경남MBC, 2023)는 불과 2년만에 영화관에서 재개봉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김씨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던 사실이 주목을 모으며 ‘역주행’을 한 것인데요. 다큐멘터리 속 ‘어른 김장하’는 여러모로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부자’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에겐 으리으리한 저택과 기사 딸린 비싼 자동차, 멋진 양복도 없었고요. 차도 없어서 여전히 대중교통을 타고 걸어다녔으며, 돈은 버는 족족 장학금이나 기부금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었죠. 초연해보이는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수백억이나 되는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정작 자신은 안락한 삶을 포기하다니!

<fig.1> <어른 김장하> 포스터. 낡은 양복을 입고 걷는 그의 뒷모습 위로 '돈은 쌓아두면 똥이 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라는 그의 말이 적혀있습니다. (왼쪽) 마지막 한약방 문 닫는 날 장학생 및 그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단체 관계자들이 함께 즐겁게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습니다. / 경남MBC

다만 이런 열렬한 반응들을 보다보니, 한 가지 질문이 제 머리를 떠돌았습니다.

과연 그는 뭔갈 ‘포기’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두가 포기하기 어려운 것을 ‘포기’했다는 차원에서 그를 대단하다고 보는데요. 어쩌면 자신이 얻은 부를 의미 있는 곳에 나누는 것 자체에 더 큰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포기라기보다는 더 나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이어, 우리가 김장하씨를 ‘완전무결한 성자’ 혹은 ‘구름 위 존재’처럼 바라보는 것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교훈이나 영감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존경할 만한 일을 한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그를 구름 위의 특이한 존재처럼 여기면서 저 스스로는 행동해야 할 의무나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고요.

그의 자선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 돈과 세계와 어떻게 주체적으로 관계맺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 나름의 답이었다고 볼 수 있고요. 이는 돈이 별로 없는 저같은 사람도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든 돈과 관계맺을 필요가 아예 없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존경스러운 어른’ 혹은 ‘자선’ 이라는 키워드 그 자체보다도, ‘부와 관계맺는 법(부를 통해 세상과 관계맺는 법)’에 초점을 맞춰 해찰해보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돈을 경유해 자신의 삶과 세상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그리고 결국 이런 일들을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죠.

오늘 레터에서는 자신이 특권층이었으면서도, 부와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은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며, 그 과정에서 과연 부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걸까? 등에 대해 해찰해볼까 합니다.

<억만장자가 사는 법>(척 콜린스), <캐비어 좌파의 역사>(로랑 조프랭),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벨 훅스)를 지팡이 삼아 보겠습니다.

【2.그 성채에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 #연결】

모두가 가난한 동네에서 나 혼자 잘 사는 것은 아주 행복한 일일까요?

우루과이의 국민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쓴 풍자소설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Upside down>(링크)에는 부자들의 요새와 같은 대저택을 ‘감옥’처럼 묘사한 인상적인 대목이 등장합니다.

작품 배경은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커서 대부분의 국민들이 불안정한 치안과 배고픔에 시달리는 중남미 국가인데요. 그렇다면 얼핏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1%의 삶은 굉장히 안락하고 사치스럽고 즐거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평생 자신을 방어하고 어떠한 진정한 교류도, 경험도 제대로 하지 못하죠.

“절망의 바다 속에는 특권의 섬들이 있다. 그곳은 권력자들이 오직 권력자들만을 만나며, 자신들이 얼마나 권력자인지를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는 호화로운 수용소이다. [...] 그들은 전기 울타리와 경비 초소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저택이나 주택 단지에서 살며, 보디가드와 CCTV로 하루 24시간 감시받는다 [...]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를 눈으로만 알 뿐이다 [...] 그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에서 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사적인 천국을 위협하는 거대한 지옥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Upside down> (*영문판 번역)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낯선 각도에서 부의 독점에 대해 곰곰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빈부격차가 심각한 세계에선 대부분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1% 역시 진정한 사회와 자신의 삶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억만장자가 사는 법Born on third base>을 쓴 미국의 사회운동가 척 콜린스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시카고의 유서깊은 정육재벌 오스카 F.마이어(링크)의 증손자로, 그야말로 “3루에서 태어난” 금수저인데요. 그는 어려서부터 최고의 사립학교부터 배타적 클럽, 최고급 저택, 사회 고위층 가족들과의 사교, 우아한 사냥 등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리며 살아왔죠.

하지만 그는 스물여섯살이 되던 해 상속 재산 전액을 기부1)했고요. 그 이후 의회와 기업, 거리를 누비며 약 30년간 상속세, 누진세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나는 시카고의 정육업자 대부호 오스카 마이어의 증손자다. 태어날 때부터 복권에 당첨된 인생인 셈이다 [...] 나는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혜택을 다 받은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우위에 있는 집안에서 자랐다 [...]

(하지만) 나는 부를 넘겨줌으로써 ‘불평등한 체제’와 그로 인해 고통이 작동하는 모습을 스스로 위축되지 않고 방어적 자세를 취하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척 콜린스, <억만장자가 사는 법>(이하 동일)

그야말로 ‘당첨된 복권을 일부러 버린’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텐데요.

그는 <억만장자가 사는 법>에서 자신이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억만장자들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고 있고 그들이 과연 진정 행복한지에 대해 다소 독특한 당사자의 관점에서 쓰고 있습니다.

<fig.2> 정육기업 대부호 집안에서 태어나 '금수저'로 살아오던 중 자산을 기부하고 사회운동가로 살아온 척 콜린스. 그는 <억만장자가 사는 법Born on third base>에서 왜 부자들이 자신들의 해방과 사회를 위해 부를 환원해야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왼쪽) 미국의 이동주택단지. 주로 저소득층이 모여서 사는 단지로, 저자는 스물네살부터 이동주택협동조합에서 근무하다가 우연히 인생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 Chealsea Green, NBC News

제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그가 단순히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든지 의무감에서 상속 자산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욕망하는 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는데요. 핵심 키워드는 ‘연결’이었죠.

즉, 그는 사회와의 건강한 ‘연결’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이 상속받은 재산을 포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으로 묘사된 ‘고립’을 크게 두가지 차원에서 정리해보았습니다.

ㄱ.사회 구조로부터의 고립 : ‘1명 > 1000명’에 대한 근원적인 죄책감
ㄴ.공동체로부터의 고립 : 다양한 타인과 대등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음

ㄱ.사회 구조로부터의 고립 :

우리는 오늘날 너무 당연하게도 1명이 가진 재산이 1000명의 재산보다 많을 수 있다고 여기는데요.

저자는 묻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그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까요?

척 콜린스는 열일곱살 이후로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있지 않고, 꾸준히 저소득층 지역의 노동자무료급식소나 탁아소, 협동조합 등에서 외부 봉사활동을 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접점을 만들어왔는데요.

그는 스물여섯살이 되던 해의 어느날, 자신이 협동조합을 꾸리던 지역의 이동주택 단지에서 임대료 3만달러(한화 약 5500만원)가 부족해서 단체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저소득층 사람들의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결국 주민들은 십시일반 없는 돈을 모아서 가까스로 자신들이 살던 ‘동네’를 지켜내게 되었는데요.

콜린스는 이 사건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만약 그가 돈을 냈다면 주민들 모두 쉽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고 그것은 그의 재산에 그닥 영향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과연 자신이 동네 사람들 수십명의 재산을 다 합한만큼의 돈을 혼자 가지고 있을 ‘자격’이 있는지, 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조사 결과 주민의 3분의 1은 저축한 돈도 없고 현재의 임차료를 지불할 만한 소득도 없었다. 대다수 주민들은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사회보장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각자 개인 수표를 끊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표들을 내게 건네주며 은행에 입금시키라고 했다 [...] 그들은 이 공원을 사들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은행으로 차를 몰았다 [...]

스물여섯살 때, 나는 버나즈톤 공원 내 이동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가진 돈을 모두 합한 것보다 서너배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불공평한 차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당시에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 재산을 모두 기부하기로 했다 [...] 30년이 지난 지금, 후회는 없다.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다. 그때 내린 결정으로 나는 내 가치관에 더욱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당시 시점에 자신 앞으로 된 상속재산을 모두 기부하고, 부의 재분배를 위해 수십년간 부의 재분배 정책을 위해 헌신해왔습니다.

<fig.3> 소득을 '키'에 비례해 직관적으로 나타낸 인포그래픽 사이트(링크). 오른쪽 끝엔 키가 1227m(약 213억원)에 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22년 기준 1인 평균 연봉(약 4100만원)을 입력하면 약 2.5m가 나옵니다. 이건 '소득' 대비이기 때문에 '자산' 대비로 하면 당연히 격차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겠죠. (왼쪽)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25명의 부유한 상속자들을 인터뷰한 책 <우리는 재산을 기부했다> 책 표지. / 경향신문, New Society Pub

부는 우리가 세상과 관계맺는 방식에 영향을 줍니다.

저자는 책의 전반부 내내 극소수의 사람이 정당하지 못한 방식으로 부를 독식하는 구조는 부당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미디어 등에선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에/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고 괴로워도 마땅하다!”는 식의 서사를 동원해 차별을 정당화곤 하는데요. 저자는 죄책감을 애써 기만으로 덮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특권층의 고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 “우리가 흔히 죄책감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부와 고통, 기회의 불공평한 차이에 대한 정상적이고 건강한 감정 표현입니다. 만일 그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조지*는 우리가 죄책감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또 한편으로는 자기증오를 불러일으켜 결국 그것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조지 필스버리(링크) = 밀가루 대기업 필스버리의 상속자로, "자선이 아닌 변화"를 위한 단체들을 후원하는 헤이마켓피플스펀드 공동설립자.

* 어렸을 때 우리 주변의 어른들에게 빈부 격차에 대해 물으면, 우리는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틀에 박힌 이야기와 신화같은 노골적인 거짓말을 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고 […] 아이를 너무 많이 낳고 […] 자제력이 부족하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은 커녕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합리화하는 말들이었다.
[…] 그 결과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마음을 닫아걸게 된다. 우리와 서로 다른 환경에 있는 사람들 간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부유한 사람들이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진정한 관계맺음을 최소화하면서 물리적 고립과 단절은 점점 더 심해진다 […] 부자 부모들은 아이들 주위로 높은 벽을 쌓는다. 그것이 아이들을 보호할지는 몰라도 세상의 고통과 수고, 변화무쌍함과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 단절과 두려움의 악순환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ㄴ.공동체로부터의 고립 :

우리는 통상 맛있는 것을 먹고, 뷰가 좋은 고급 집에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이 삶의 제일 목표인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부를 가진 이들은 진정한 관계맺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특권은 그들이 공동체에서 붕 떠있을 수 있게 하며, 거리의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죠. 통상 이런 진공상태는 많은 사람들이 막연히 바라는 것이지만, 공동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빈부를 막론하고 깊은 무력감과 단절감을 줄 수 있습니다.

찰스 아이젠스타인이 말하는 것처럼 “공동체는 어려움을 만나면서 생겨난다.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설 수 있는 공동체는 없다” […] 부자들은 “난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원하는 서비스의 대부분을 돈을 주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에 우리의 취약성을 노출하거나 부족한 것을 표현할 필요가 없다.
[…] 나는 매우 부자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깊이 단절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진심을 나누는 진정한 공동체에 목말라 하고 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노는, 그리고 재미없고 만족스럽지 못했던 최근 휴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모임들을 찾는다1) [...] ‘공동체는 지금 우리처럼 고도로 자본화된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공동체는 선물로 서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사실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것과는 달리 의외로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일과 삶이 사회에 어떤 식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곰곰 궁리하고 또 그것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잘 알려져있진 않은 사실입니다만, ‘욕구 계층이론’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죽기 전에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위치한 ‘자아실현의 욕구’ 위 맨 꼭대기에 ‘초월적 욕구(transcendence)’를 더한 바 있는데요. 여기서의 초월적 욕구란 단순히 개인의 욕망을 실현하는 걸 넘어서, 타인과 공동체와 연결되고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욕구를 뜻합니다. (링크)

실제로 미국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불쉿잡>이라는 책에서, 고수익 화이트칼라들이 돈을 많이 벌면서도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는 - 때론 오히려 사회 정의를 해치는 - 일(예를 들면, 효율적으로 복지를 삭감하는 일, 불법행위를 한 기업을 변호하는 일, 탈세 보조 등)을 해서 몸과 마음이 철저하게 병들어가는 과정을 쓰기도 했죠. (링크)

이때 자신이 가진 부, 특권이 개인의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에서 정당한지를 따져보는 것은 스스로 개척하는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족기업의 상속자로, 교사 생활을 하며 무력감을 느끼다가 - 현재는 부자들이 자신의 ‘특권’을 정직하게 직시하고 그것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 에이브 레타이너는 말합니다.

“나는 그동안 (백인-특권층으로서) 속았고 [...] 그런 억압에 대해서 침묵하게 하고 외면하게 먹잇감을 던져준 것이었어요. 그러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중요한 것을 죽이는 일입니다" [...]

“이제 나는 [...]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들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내게는 나만의 고유한 가치가 있어요. 나는 이제 내가 압제자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가치 있는 일을 할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투항해야 합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은, 불편한 의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회에 제대로 위치짓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능동적인 과정이라고요.

“집으로 돌아오기”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사실 하나는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는 점이다 […] 신성한 삶에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갈망을 충족시킨다. 누군가가 대저택에 사는 것을 포기하고 이웃집과 가까이 붙어서 살기로 결정할 때, 그것은 금욕과 박탈감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와 자연,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욱더 긴밀하게 연결되고 싶어서 내린 선택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공허함, 그 볼품없음을 견딜 수 없어 그것을 치워버릴 것이다. 우리는 정신적 자양분에 목말라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적이고 서로 연결된 의미있는 삶을 갈망하고 있다 […]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공동체는 새롭게 일어설 것이다. 정신적 자양분은 오로지 선물로서, 즉 우리가 주는 자와 받는 자로 참여하는 선물의 그물망의 일부로서만 우리에게 올 수 있기 때문이다.(찰스 아이젠스타인)’

1) 빈털터리가 된 것은 아니고 26살 시점의 상속 재산을 기부한 것이라(현 가치로 약 700만달러 추정), 책을 읽다보면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추가로 더 추후 물려받을 자산이 있는 것같은 표현이 등장하기는 합니다(구체적인 규모나 그것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해선 책에 자세히 나오진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문자 그대로 진짜 모든 돈을 다 기부하고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는 부유한 가문에 기댈 수 있겠죠. 하지만 그가 거의 40년간 특권을 누리는 대신 소박한 생활을 해왔다는 점, 이어지는 아래 '챕터3'의 메시지를 감안한다면, 이런 '안전장치'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흰눈으로 볼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2)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최근에 다루었던 제3의 장소 관련 회차(링크)의 챕터4에 잠깐 다루었던 더월드호의 사례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더월드호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120여개의 객실을 '전부' 분양으로 운영중인 '움직이는 동네'라고 할만한 폐쇄적인 최고급 크루즈인데요. 이곳을 직접 취재한 기자에 따르면 겉보기엔 굉장히 화려해보이지만, 정작 내부는 놀라울정도로 활력이 없다고 합니다.

【3.아웃사이더들이 만들어온 진보의 역사 : #욕망】

“캐비어 좌파가 누구인가? 바로 지배계급 중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분파, 지배받는 자들과 같이 행동에 나서는 분파가 아닌가?”

-로랑 로프랭, <캐비어 좌파의 역사>

<억만장자가 사는 법> 책을 덮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어떤 생각이 듭니다.

이런 ‘유별난’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나도 미약한 물결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하지만 의외로, 역사에서 - ‘수상한 아웃사이더’ 특권층이 약자의 권리와 사회 전체의 진보를 위해 함께 투쟁해온 전통은 굉장히 길다고 합니다. 또한 그런 노력은 단지 찻잔 속 태풍이라거나 자기만족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와 평등, 약자의 권리를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하고요.

이처럼 특권층에 속해있으면서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해온 존재들을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로랑 로프랭은 “캐비어 좌파”라고 불렀는데요.
*캐비어 좌파 = 우리나라의 ‘강남 좌파’와 비슷하게 보통 겉모습만 진보인척하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위선적인 엘리트층을 프랑스에서 멸시적인 의미에서 표현하는 단어. 하지만 로랑 로프랭은 자신의 계급의 이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지언정, 진심으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이나 평등을 위해 노력하는 계층을 지칭함.

핵심부터 말하자면, 이들 역시 거창한 대의나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 개인적인 신념과 열정에서 때론 자신의 특권 발판을 스스로 부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로랑 조프랭이 쓴 <캐비어 좌파의 역사>는 주로 근대사에서 ‘사치스러운 철부지같기도 했던 엉뚱한 아웃사이더 특권층’들이 어떻게 결과적으로 자신의 계급을 효과적으로 배반해 민주주의를 앞당겨왔는지에 대해 다룬 독특하고 흥미로운 책입니다.

<fig.4> <캐비어 좌파의 역사> 책 표지. 이 책의 한국어판 부제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선 부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고대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부터 볼테르, 에밀 졸라, 외젠 쉬 등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고 약자들을 위해 싸웠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왼쪽) 프랑스의 언론인 로랑 조프랭 / 워드앤코드, Le Journal

이 책의 맥락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캐비어 좌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정리해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ㄱ.자신이 특권계층임에도 불구하고

ㄴ.열정, 신념 혹은 그냥 학문적 호기심 등에 따라

ㄷ.사회적 약자, 빈민을 위해 때로 자신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배반하기도 하는 이들.

추가로,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한다면 - 딱히 자신이 누리는 특권 사다리에서 뛰어내릴 생각은 없고,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대의를 위해 특권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사람이라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때문에 이들은 양쪽에서 모두 ‘박쥐같은’ 인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곤 하는 아웃사이더였지만, 역사의 진보 과정에서 상상 이상으로 큰 일을 해냈다고 하죠.

* 권력자들과 어울려 살지만 역사의 움직임 속에서 전복적인 역할을 수행한 좌파가 우리의 연구 대상이다 […] 내부의 아웃사이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탐구하는 엘리트 좌파의 정확한 정의이다.

* 캐비어 좌파는 또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다. 프랑스대혁명 이전만 보더라도 지도 계급 인사들이 피지배 계급에 유리한 사회개혁을 요구한 바 있다.

궁정작가이면서 엄청난 부자였던 볼테르는 정의 그러니까 모두에게 평등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해 투쟁했다 […] 공화주의자이며 민중 또는 하층민들과 가깝게 지낸 빅토르 위고에 대해서는 늘 성공한 작가로서 그가 누리는 호사스러운 생활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에밀 졸라도 격조 있는 아파트에 살며 시골에 별장을 소유 […] 똑같이 비난을 받았다 […] 광부들의 친구라고 자처하는 장 조레스마저도 좌파 내부의 반대자들로부터 부르주아라고 손가락질당했는가 하면 우파로부터는 배신자 취급을 받았다 […]
캐비어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잡종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중개인이거나 밀사, 뱃사공 같은 존재다. 이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어느 한 곳에도 똑부러지게 위치시킬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존재는 뚜렷하게 감지된다.

-로랑 조프랭, <캐비어 좌파의 역사>(이하 동일)

통상 사람들이 캐비어 좌파에 대해 ‘완전무결한 당사자(빈민)가 아니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에 대비해, 저자는 이 독특한 사람들의 좀 다른 측면에 주목합니다.

즉 캐비어 좌파가 ‘순수한’ 빈민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캐비어를 먹으면서도 굳이 때론 자신의 안전한 저택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죠.

저자는 오늘날 워낙 빈부격차가 커지고 부자/빈자의 교류가 점차 막혔기 때문에 실감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과거 지금만큼 단절이 심하지 않던 시기엔 <우연한 계기>로 부자들이 세상의 비참함을 바라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책에서 저자는 수많은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이들이 어떤 계기로 구체적으로 끼인 자들이 우연히, 수상한 방식으로, 자신의 계급에 반대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이들은 결코 투철한 사명의식이라든지 노블리스 오블리주 같은 마음으로 거창하게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안온하게 살아가도 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우연에 의해 자신이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고, 자신의 호기심이나 양심에 따라 ‘문득’ 자신의 삶의 노선을 갑자기 틀어버렸죠.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외젠 쉬의 경우였는데요. 프랑스의 유명 소설가 외젠 쉬는 부유한 집안 출신에 생전에 자신의 대중적인 소설들로 엄청난 명예와 부를 얻었고, 영원히 평등이나 악자들의 삶에는 신경쓸 필요도 없는 특권층이었습니다.

<fig.5> 타고난 '금수저'에 본인도 잘 나가는 대중작품으로 큰 돈을 벌었던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외젠 쉬(링크). 그는 얼마든지 평생 민중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수도 있었지만, 어느 '조우'가 계기가 되어 민중을 위한 정치활동을 시작하고,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왼쪽) 에밀 졸라가 거주하던 고급 맨션으로 현재는 'Masion Zola'라는 이름으로 드레퓌스 박물관 옆 대중에게 공개가 되어있습니다. 그는 루공마카르 총서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절실하게 그려내왔으며 유대인 대위 드레퓌스를 위해 자신의 명성과 특권을 걸고 투쟁하다 목숨을 잃기에 이르렀지만, 아름다운 것들에 집착한 것은 여전했죠. / Wikipedia, 공식홈페이지(링크)

하지만 어느날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를 막간에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바뀌게 되어버리죠.

그런데 <파리의 미스터리>*를 쓴 작가는 어째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이 또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1841년 어느날 저녁 공화주의적 성향의 기자이자 극작가인 펠릭스 피야가 자신의 작품 <두명의 열쇠공>의 막간 휴식 시간에 외젠 쉬와 담소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있다. 훗날 열렬한 블랑키 지지자로 제정에 반대했으며 1871년 코뮌을 이끌었고 마르세유의 공화파 의원이 된 피야는 동료로서 공연장을 찾은 쉬에게 ‘노동자라는 사회적 신분’을 세세하게 묘사해보였다 […] 다음날 두사람은 피야가 자주 만나는 한 노동자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 노동자는 심금을 울리는 능변으로 ‘노사 문제’를 설파했다. 외젠 쉬는 그의 집을 나서면서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외쳤다.
[…] 유명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아버지가 정해준 대로의 삶을 거부하기 위해 선원이 되었다가 화가로 돌아섰던 그는 무엇보다도 좋은 마차를 타고 다니며, 잘 재단된 멋진 옷,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고급 장갑 등을 착용하는 신사였으며 […] 호색 취향의 저녁 모임 등으로 인생을 허비하는 남자였다 […] 읽기 쉽고 대중적인 그의 소설은 그런대로 잘 팔렸다. 따라서 그는 수입을 이용해서 상속받은 재산을 더 크게 불려나갈 수 있었다 […] (하지만) 1848년에 그는 사회주의 공화당에 합류한다 […] 그는 정부 당국으로부터 점점 더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 (결국 그는) 망명길에 오른다.

*<파리의 미스터리>(1842~43·링크) = 외젠 쉬가 쓴, 파리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매춘부, 범죄자 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도와주는 연작 소설. 프랑스에 '연재소설'이라는 형식을 최초로 정착시킬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저자는 이런 일련의 행동은, 결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든지 ‘의무’ ‘헌신’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계몽주의 운동은 세상을 바꾸었으며 인간의 운명이 나아가는 방향을 보기좋게 틀어놓았다. 하지만 그 운동은 사회적 계급에서 기인했다기보다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들의 선택 곧 지적인 활동에서 비롯되었다 […] 구체제에 대항하여 힘을 모으기 시작했을 무렵 그들은 이미 안정적인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은 상태였다. 세도가들의 친구였던 그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는 세도가들에 대항해서 벌이는 투쟁에서 무슨 이득을 얻었겠는가.

그들은 이해 타산적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엘리트라는 전체에서 분리된 일부 엘리트의 힘이라는 역설이다. 그들은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크게 얻을 것이 없었고, 정신적인 만족감, 자기 만족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반드시 이들이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갑자기 성자처럼 자신의 재산을 다 털어넣지 않더라도, 이들은 나름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도 부를 활용해 자신이 믿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굉장히 많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항상 세계와 공동체는 둘째치고 자신의 부를 무조건 많이 그러쥐는 것만이 행복의 길이라고 믿는다는 - 오늘날의 수많은 미디어 등이 설파하는 ‘진리’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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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 특권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자원을 함께 나누고, 특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특권을 사용해야 한다.” -벨 훅스, <집에서 기르다(Homeg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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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특권층 사람들이 인간을 억압하는 제도들, 즉 노예제나 인신매매, 아동노동같은 악습에 맞섰던 사례들이 많이 있다 [...] 벨기에 왕 레오폴트 2세에 맞선 1902년 운동은 벨기에 왕의 강제노동에 예속되어 있던 콩고인들과 영국인들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 사례였다. 압제에 저항하는 이런 운동들은 특권층 내에 있는 동맹자들과 함께 진행한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 척 콜린스, <억만장자가 사는 법>

【4.이것은 모두의 문제다 : 나의 ‘자리’에서 ‘연결’ 되기】

여기까지 우리는,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 신념, 호기심 등을 위해 미련없이 자신의 부를 때론 ‘포기’하기도 했던 이들의 낯설고도 다양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두에게 부가 가장 중요하고, 특권층들은 항상 자신의 욕심에만 매달렸을 거야!"는 대체적인 <고정관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때로 연결, 호기심, 욕망 등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자신의 부를 희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겐 기쁨이었죠.

핵심은, 이들이 맹목적으로 부를 좇기보다는 - 자신의 삶에서 어떤 가치를 가장 최우선으로 둘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자리’에서 사회와 연결된 채로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이런 궁리가 일부 부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더 나은 삶과 사회를 위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는 거죠.

마지막으로 간단하게 살펴볼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미국의 사상가 벨 훅스가 빈곤한 노동계층 출신 흑인 여성으로서 부자 사립학교, 스탠퍼드에 입학하고 예일대학교 조교가 되고 이윽고 저명한 상류층 작가가 되는 - 그야말로 전형적이라고 할 수 있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과정을 돌아보며 쓴 에세이인데요.

이 책에서 벨 훅스는, 가장 가난한 세계와 부의 세계 두쪽 모두에 몸 담았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특하고 힘있는 메시지를 내어 놓습니다.

<fig.6> 우리나라에선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Where we stand>가 절판된 이후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두 제목 모두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인상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아 왔고, 각자의 '자리'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왼쪽) 가난한 노동계급 출신으로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학자로 '상류층'에 진입한 벨 훅스. 이런 소개는 역시 어색한데요. 그럼에도 저자는 자신의 '자리'가 바뀌어온 과정을 이 책에서 굉장히 강조합니다. / 책 표지, NYT

책의 핵심 메시지를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오늘날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공동체와의 연결, 삶의 행복을 잃게 된 것은 부자 뿐 아니라 오히려 빈민들에게 더 극심한 문제가 되고 있다! >

그 이유는 모두가 가난을 악덕으로, 부를 미덕으로 칭송하기에 가난은 애써 숨겨야 할 죄악이 되기 때문인데요. 누구도 “안녕, 나 쫌 가난해”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죠. 이 시대엔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고, 능력이 없고 악덕하기 때문이라는 서사가 힘을 얻곤 하니까요.

이에 가난한 사람들이 오히려 '가난'을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 소비를 통해 이를 벌충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연대를 하지도 못하고 각자 자신이 가진 더 조그만 동전을 꼭 쥐며 외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3)

계급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물질적 부를 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요즘, 가난한 사람들과 연대하기란 쉽지 않다 [...] 안타깝게도 자본주의 문화에서는 부유하든 아니든 소비에 집착하게 된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더 심하다. 왜냐면 미디어나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하위 계급이기에 느끼는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길은 소비뿐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에 가장 취약하기 때문이다.

광고나 대중문화는 가난한 사람도 부유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사용하면 그들과 같아질 수 있다고 부추기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계급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헛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가난한 이들이 받아들여 내면화할경우 그들 스스로 탐욕에 사로잡히고 착취를 자행하게 된다.

[...] 계급적 특권이 없는 사람들이 부자와 같은 물건을 소비함으로써 그들처럼 부와 권력을 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은 부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동조하면서 스스로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언론은 무산 계급에게 부자처럼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교육용 도구 역할을 수행했다 […] 언론에 의해 지배 계급이 무산 계급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고 낫다고 믿도록 사회화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나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협력하려 들지 않는다.

-벨 훅스, <벨 훅스, 계급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이하 동일)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와 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중요한 가치에 집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벨 훅스에 의하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인 첫 단계는 -

자신이 선 <자리>를 똑바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책의 영어 원제는 <우리가 선 자리 : 계급은 중요하다Where we stand: Class matters>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돈이나 계급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꺼리는데요. 그것은 '예의'나 '프라이버시'라기보다는, 단지 존재하는 계급 불평등을 바라보지 않기 위한, 자신의 돈과 자리를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않기 위한 '눈 가리기'에 가깝다는 것이죠.

* 돈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를 꺼려하는 태도는 사회적 예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면에 감추어진 돈에 대한 경쟁심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기 위한 꼼수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다른 사람이 모르게 숨기기 쉽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사람에 대한 경제적인 책임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필요한 것이든 사치품이든 고가의 물건을 산 경험으로 나도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때보다 적게 벌고 적게 소유했던 시절에는 항상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돈을 더 많이 벌고 사들이는 물건도 많아지니 […] 점점 더 탐욕의 꼬임에 넘어가는 일이 잦아졌다. […] 다른 사람에게 빚진 것 하나도 없다고. 당신은 열심히 일해서 이것들을 샀다고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난한 노동계급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종종 빠지는 함정에 나도 빠진 것 같았다.

* 나는 가난한 것이 절망에 가득 찬 불행한 삶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세상에 태어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가난한 흑인들-주로 젊은층-은 우리 선조들이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난과 가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위와 같은 의식이 전혀 없다. 그들은 사람의 가치가 재산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으로부터 방패가 되어 줄 계급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 (나의 부모님은) 고난뿐인 삶 속에서도 위엄과 명예를 잃지 않는 삶을 사셨다. 부가 삶의 유일한 의미라는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으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가 그 자체로 우월함, 행복이 될 수 없듯, 가난은 그 자체로 불행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괜찮아!'라는 자기위안 및 빈부격차를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이야기라기보다는, 가난 그 자체가 개인의 삶을 상처입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대부분의 부와 성공이 (흔한 능력 중심 서사와는 달리) 한 사람만의 노력과 뛰어남만의 결과가 아니듯(링크), 가난은 개인의 탓이 아니고, - 이를 인정할 때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터놓고 나의 괴로움을 솔직히 이야기할 수도 있고, 연대의 가능성이 생겨날 수도 있다고 강조하죠.

지난 10년간 내가 번 돈은 나를 상위계급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가 속한 계급 권력이 주는 편리를 종종 이용하곤 하지만 진심으로 이 계급에 동조하지는 않는다 […] 나는 나를 상류계급으로 만들어준 돈이 부의 재분배를 위해 쓰일 수 있어서 정말 좋고, 그 돈으로 나눔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경제적 행복을 도울 수 있어서 좋다 […]

지금까지 책을 쓰면서 이번처럼 강렬한 고통이 사무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래서 책상머리에서 가슴을 뜯으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지금 나는 특권 계급에 속해있지만 빈민층과 노동 계급의 일원으로서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 사람들이 돈을 벌고 가진 것을 나누는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압제와 착취가 벌어지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

[…] 나는 이 책에서 돈이 없어서 기본적인 혹은 풍족한 삶을 살 수 없는 고통, 즉 커져가는 빈부격차가 경제적 고통 이상의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을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3) 전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해왔던 문제와 관련해, 큰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왜 오늘날엔 가난한 사람(esp청년)이 눈에 보이지 않을까?'라는 오랜 질문이었는데요. 실제로 십여년전엔 이 질문이 계기가 되어 한 주간지가 기획보도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링크1 링크2)

다만 이를 경제 구조 차원이 아닌 벨 훅스의 맥락(가난에 대한 수치심, 거기서 기인하는 소비)에서 볼 때, <가난을 숨기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면서 가난한 자들은 위축해 스스로를 지우려 하고, 저소득층들조차도 중산층 이상이 소비하는 수준의 사치품들을 무리해서 구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큼직한 로고가 박혀있는 명품, 커다란 버버리 체크는 한때 영국 빈민층Chav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링크) 실제로 제가 예전에 재밌게 읽은 패션 저널리스트가 쓴 명품업계에 대한 책 <럭셔리>(링크)라는 독특한 책에 따르면, 20세기 말 본격적으로 명품이 대중화/미국화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가장 큰 특징은 과거엔 명품이 극소수 0.1%를 위한 진정한 사치였지만(실용적이지 않은 최고급 드레스, 한명을 위한 구두, 맞춤형 가구 등 위주), 오늘날엔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도 그 환상을 나누어줄 수 있도록 저가 대량생산, 가성비 제품들(기성품화 된 핸드백, 스카프, 화장품, 향수 등)을 대폭 늘렸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상 외로 후자로부터 나오는 폭발적인 수익이 수많은 명품 브랜드들에게 제2의 도약을 위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습니다. 사실상 수익 구조가 극적으로 바뀌어버린 거죠.

물론 가난하다고 해서 아름다움과 쓸모없는 사치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단지 자신의 '자리'를 잊고 도망치기 위해 무리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그런 과정에서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부분의 자기 객관화가 안되는 부자와 마찬가지로 부와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맺음말】

오늘 편지의 메시지를 대략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오늘날 사람들은 부를 으레 최고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곤 한다.

1. 하지만, 역사적으로 많은 특권층들은 부 대신 다른 가치를 위해 삶을 살았다. 그들이 '숭고한 희생자, 성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에 진지하게 연결되고 삶에서 의미, 재미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 본성이기 때문.

1.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 자신의 <자리>를 의식하고, 부와 어떻게 관계맺을지를 고민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처음부터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만, 이번 회차를 마무리하다보니 의외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언론, 책 등에서는 통상 빈부격차의 문제를 ‘구조’ 문제로 다루는 경우가 많지만, 오늘 함께 읽어본 세 권의 책의 특징은 - 바로, <개인>을 가장 전면에 내세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도 그 안을 살아가는 개인들의 태도와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 메시지가, 오늘날 너무 낯설고 이상한 이야기이면서도 - 동시에 가장 간과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곰곰 생각해보았습니다.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척 콜린스, 김병순 옮김, 『억만장자가 사는 법』, 한국NVC출판사, 2024.

-오늘 다른 책들, 특히 이 책과 <캐비어 좌파의 역사>는 정말 여러모로 이상하고 독특한 책입니다. (제가 독특하게 읽었다기보다는, 이 경우는 책이 독특하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기존에 부자의 오블리스 오블리주나, ESG 경영, 자선사업 등에 관심이 없었고 개인적으로는 긍정 부정 중 부정에 가까운 입장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이지 "착한 부자 개인"이 뭔가를 하는 게 아니니까요. 특히 이 책의 제일 이상한 부분은 "부자도 인간이다. 부자와 적극적으로 친구를 하라 - 그래서 그가 자신의 몫을 사회에 다하게 이끌어라(?)"는 주장인데, 심지어 이 주장이 일부에 불과한 것도 아니고 오늘 제가 레터에서 다룬 대목 만큼이나 중심이 되는 또 다른 하나의 주된 주장입니다. 여튼 여러모로 심란해지는 낯선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이 책을 제가 끝까지 읽게 된 것은, 그가 당사자로서 풀어놓는 이야기에서 모종의 진정성을 느꼈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이 책 중에서 (레터 본문에도 짧게 인용했지만) 상속자 '애이브 레타이너'의 사연을 가장 인상깊게 읽었습니다.(p.330~337) 그리고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것이 꼭 '빈부'의 문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인종, 성별 갈등 등에서도 똑같이 통용될 수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핵심은, 소위 개인을 악마화하지 않고 그들을 인간으로서 환대하는 태도입니다.

책의 논지에 100% 동의하며 읽은 것은 아니지만, 여튼, 이 책은 관련 문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가벼운 마음으로 한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중간에 좀 지루한 부분들이 나오는 건 건너뛰어도 좋습니다). 이 책은 '유려한 필치'만으로는 불가능한 좋은 에세이(김스피적 기준에 따르면)의 3박자를 갖추고 있습니다. 1.특이한 저자 2.가식적이지 않은 진솔하고 투박한 태도 3.이상한 말 (제가 독서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추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만, 이 책은 정말 - 편견을 일단 내려놓고, 많은 사람들이 읽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부자이시라면 더더욱요.)

로랑 조프랭, 양영란 옮김, 『캐비어 좌파의 역사』, 워드앤코드, 2012.

-실은 이 책은 꽤 예전에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해 읽었던 책이었는데, 그 당시 너무 이상하고 흥미롭게 읽어서(...🤣) 언젠가는 꼭 다루고 싶었던 책이었습니다. 최근 <억만장자가 사는 법>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책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고, 오랜만에 다시 읽고서 오늘 레터에 함께 다루게 되었습니다.

레터 본문에서도 썼지만, 이 책 속 등장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척 콜린스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척 콜린스는 자신의 부가 부당하다고 여겨 거의 전재산을 기부하고 꼭 필요한 만큼 이상의 사치를 누리려고 하지 않지만 이 책 속 등장인물들은 여전히 '캐비어를 먹는' 난봉꾼이었기 때문입니다. 통상 '캐비어 좌파'하면 진정성이 부족한 좌파라는 차원에서 매도되곤 했지만, 저자는 오히려 역으로 캐비어를 먹는 이들이 '굳이' 좌파가 된 미스터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구도 그들에게 민중의 편에 서라고 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이들이 얻는 명백한 이득이 없었음에도 이들은 양쪽으로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으면서도(?)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다만 오늘 레터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진 않았지만, 저자가 긍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캐비어 좌파'이고 오늘날 이들은 민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자신의 잇속만 챙기기 시작하며 과거의 매력과 정당성을 잃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예전부터 인스피아를 읽어오셨던 분들이라면, 이쯤에서 다소 기시감이 느껴지실 수도 있는데 저는 당사자가 아닌, 그닥 비장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고통을 위해 연대하는, 완전무결하지 않은 앨라이(연대자) 이슈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책과 함께 과거 인스피아 회차 (💌타인의 삶을 구경하기 / 💌남의 일기 대신 써주는 사람)를 함께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는 월말 에세이 회차에 조금 더 자세하게 적어보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벨 훅스, 이경아 옮김,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모티브북, 2008.

페페연구소 기획, 『벨 훅스 같이 읽기』, 동녘, 2024.

-오늘 레터에서 다룬 <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는 절판되었다가 2023년 초 문학동네에서 <당신의 자리는 어디입니까>(링크)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원제목은 “Where we stand : Class matters"입니다. 벨 훅스는 우리에게 성별,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사려깊게 짚어온 학자로 익숙한데요. 저자는 스스로도 이 책에서 자신이 '계급'을 중심에 두고 쓴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며, "가슴을 찢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계급은 명백히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 이 때문에 그는 우리가 선 '자리'를 공동체 안에서 담백하게 의식하고 그로부터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최근 '취약함'에 대한 에세이를 썼었는데, 가난은 오늘날 가장 감추고싶은 취약함 중 하나이고 물질문화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고 그 과정에서 과도하게 소비에 매몰되도록 합니다. 이는 부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마찬가지로 물질에 필요 이상으로 얽매이도록 하는 처사입니다. <벨 훅스 같이 읽기>(링크)의 한 챕터에서 이 책을 읽은 독후감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내용과 별개로, 이 책을 읽으면서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링크)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유는 벨 훅스도 에리봉과 마찬가지로 빈곤한 노동계급 출신으로 지식인-상류층이 된 케이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에리봉이 오랜 세월 자신의 출신 계급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했던 반면, 이 책에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출신을 자각하고 자신이 선 자리를 기반으로 살아가려는 태도를 보입니다(사실 에리봉의 태도가 더 일반적이겠죠.). 사실 <캐비어 좌파의 역사>에선 부각되진 않았지만, 필요할 때 약자의 편에 서거나 내부고발에 나서는 '아웃사이더 특권층' 중 상당수는 개천에서 난 용의 경우가 많습니다.(실제로 나중에 기사들을 읽으실 때,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보아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그건 아마도 이들이 현재는 특권을 가지고 있지만, 특권이 없는 삶이 어떤것인지에 대해서 또한 몸소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세계의 유력한 중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겠죠. 어쩌면 계급 이동이 끊긴 사회라는 것은, 단순히 성공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에서 문제일 뿐 아니라 이런 점(엘리트 계층 내 아웃사이더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일지 모릅니다.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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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독서시간: 약 4분 / 글자수: 약 1600자

🖍글 속 한 문장

요즘은 기부금 용도가 다원화되면서 동물 구조, 미혼모 돕기도 눈에 띄고, ‘독도 알리기’ 같은 활동에 후원금을 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마다 기부자들의 이타적인 통 큰 결단에 감탄, 감동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을 피할 길 없다. 왜냐하면 상당한 기부금이 [...] 구조적 문제 해결에 별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훈훈한 기사가 넘치는 것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표지가 아니다. 매년 되풀이되는 자선 및 구호 활동은 그런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 국가가 개별 시민, 봉사 및 자선단체에 책임을 전가했다는 얘기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특정 사건이나 대상을 딱 짚어서 하는 '자선'에도 의미가 아주 없진 않겠습니다만, 과연 궁극적인 구조/부의 재분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자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권혁범 명예교수는 칼럼에서 개인, 특정 사건에 대한 자선 외에도 '부의 재분배' 및 '권력의 감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에 대한 기부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레터의 본문에선 충분히 다루진 못했지만, 척 콜린스의 책에서는 대다수 억만장자 부자들의 '자선'을 비판하며, 자선이 아닌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선은 일방적이고 계급적인 호혜관계이지만, 변화는 궁극적으로 베푸는 사람과 내 관계가 동등해지기 위해 사회를 바꾸는 일이죠. 그는 다른 사람들과 공저한 <로빈훗이 옳았다>(링크)에서 사회 구조를 바꾸기 위한 자선을 강조하며, 단순히 돈을 던지고 땡인 게 아니라 -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기부할 것인가의 문제도 기부 그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해왔습니다.

“난 제이미맘이 아니니까”...풍자의 이면

독서시간: 약 7분 / 글자수: 약 3300자

🖍글 속 한 문장

제이미맘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한편으로, 제이미맘의 사교육 실천은 대치동 바깥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으며 그 실천의 논리는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남들도 다 하니까...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아이를 잘 키워야지 다짐하더라도 그 다짐 역시 기존의 선택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제이미맘은 나이며 당신이다. "대치동 아이들은 더 많이 한다는데"며 불안해하는 당신, "대치동에 비하면 많이 시키는 것도 아니니까"라며 학원 뺑뺑이를 합리화하는 당신, '대치맘'과 다르게 아이를 키워야 한다며 그들의 실천을 끝없이 의식하는 당신...

👤김스피의 블라블라

최근 개그우먼 이수지가 연기한 '제이미맘'(자녀 교육에 극성인 대치동 어머니를 풍자한 가상의 캐릭터)이 사회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너무 '현실적'이라서 소름이 돋을 정도라는 평도 많았죠.

그런데 제이미맘을 보고 웃은 사람들의 심리를 살펴보면, 실은 그 기저에는 '나는 제이미맘이 아니니까'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 영상을 보며 '뭐야, 이건 나잖아?'라고 생각했다면 그 풍자를 보고 웃기는 어려웠을테니까요. 즉, 요는 남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로 웃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개그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이들조차도, '이거 내 얘기니까 기분나빠. 그만둬'라고 말한 게 아니라 - '누군가를 조롱하는 것은 나쁜일'이라는 차원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제이미맘이 -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녀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쏟는 부모, 삶의 최고 목표를 오직 좋은 학벌- 상류층에의 진입을 꿈꾸는 세태를 표현한다면, 과연 이 문제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문득 저는 이 칼럼을 보면서, 월 700만원 이상을 버는 사람의 76%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긴다는 보도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링크). 여러모로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는 데 서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개인으로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전혀 신경쓰고 싶어하지 않은 심리와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특권이 왜 나의 것이어야 하는가?”

독서시간: 약 3분 / 글자수: 약 1300자

🖍글 속 한 문장

엥겔혼은 약 150년 전 독일의 화학 회사 바스프를 창업한 프리드리히 엥겔혼 가문의 자손이다...이 가문이 기부에 인색한 건 아니다. 엥겔혼의 조부모님은 젊은 과학자 양성을 지원했고 종조부인 커트 엥겔혼도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엥겔혼은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구조적 변화”라고 강조했다.
엥겔혼은 오스트리아 빈 부촌의 고급 저택에서 자랐다. 프랑스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면서 평범하게 자랐다는 그는 “내가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작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저 친구들은 왜 정원이 있는 큰 집에서 살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특권은 세계를 편협한 시각으로 보게 한다”고 꼬집었다. 빈 대학에 진학한 후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됐다. 성 소수자 인권단체 봉사에 나서고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ㆍ성차별에도 관심을 가졌다...그는 “내가 돈을 받을 사람을 결정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누구에게 돈을 줄지) 나에게는 불가능한 이 결정권을 조세 정의가 가져가 주면 좋겠어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자신이 상속받은 수백억대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기로 결정해,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슈가 되었던 오스트리아의 젊은 상속자 마를린 엥겔혼(30)에 대한 기사입니다. 그는 부유한 상속자들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라는 '택스미나우Tax me now'의 공동설립자이기도 합니다. 예전 이 기사를 읽었을 당시엔, '와 대단한 사람이구나'라는 것 외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레터를 쓰고 나서 자세히 읽어보니, 여러모로 척 콜린스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 척 콜린스와 비슷하다는 의미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고, 자신의 부를 효과적으로 쓰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란 차원입니다.

특히 그가 속한 가문이 그간 해온 '기부'와 달리 그는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요. 그는 단지 돈을 자신의 뜻대로 기부하지 않고, 여러 구성원들을 포함한 심의회를 꾸려 이들이 직접 액수 및 기부처를 정하도록 했다고 합니다.(링크)

동네에 금수저 친구 많으면 소득 높다?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700자

🖍글 속 한 문장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도 부유한 친구들과 자주 어울린다면 성인이 됐을 때 소득이 높아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일 네이처지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저소득층 어린이라도 친구의 70% 이상이 고소득층인 동네에서 자란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성인이 됐을 때 소득이 약 20%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 연구를 주도한 라지 체티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계층간 경계선을 넘나들며 서로 어울리는 지역에서 자라난 어린이는 나중에 커서 더 좋은 결과를 얻고,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연구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2022년 연구(논문 링크)에 대한 기사입니다. 이 기사를 처음 인터넷창에서 접했던 때의 기억이 납니다.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해외 연구를 가져와 기사를 쓰면서, 제목을 '금수저 친구 근처에라도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기생하며) 떡이라도 하나 먹을 수 있다'는 느낌으로(영화 <기생충> 느낌의?) 썼었는데요. 이 기사의 제목을 보고 느낀 감정은 왠지 모르게 찝찝하게 오래도록 기억 한켠에 남아있었습니다.

물론 이 결과에는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을 것입니다만,(대표적으로는 부유층들이 모인 곳에선 벌이가 좋은 양질의 일자리, 인프라가 비교적 지역사회에 많을 수 있다는 점 등) 오늘 레터를 쓰면서 한 가지 생각이 새롭게 들었습니다. 해답이라기보다는 미약한 실마리, 혹은 꼬리를 이은 또 다른 질문입니다만.

- 저 동네에서 저소득층과 함께 어울린 금수저 친구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그리고 저소득층 친구들이 받은 영향은 비단 소득의 차원에 한정된 것이었을까? 그 영향은 수치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한사코 이런 종류의 연구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받은 혜택에만 시선이 집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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