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범죄’와 유머 : 증오는 결핍(-)이다

2024. 12. 3.

‘증오범죄’와 유머 : 증오는 결핍(-)이다

Hate crime and humor

저자 김스피

(Authors) Kim, Supi

출처 인스피아 저널, (143), 2024.12.4, 1-8 (8pages)

(Source) Journal of the Inspia

지난회차 https://page.stibee.com/archives/107426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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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터의 하단에 짧은 휴재 관련 공지가 있습니다.

키워드: 증오, 범죄, 유머, 웃음, 연민

1.머리말
2.증오범죄를 과대평가 말라 : 범죄자의 마음은 증오로 ‘가득’했나?
3.유머와 불완전함 : 우리 모두 원래 좀 바보다
4.유머와 연민 : 장난칠 수 있다면 증오하지 않는다
5.맺음말

【1.머리말】

안녕하세요. 연구자님. 느릿하게 해찰하며 걷는 것을 좋아하는 김스피입니다.👤

전날(3일) 늦은 밤 사무실에서 편지를 마무리하던 중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저는 놀라움과 참담함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링크) 연구자님들께서도 뉴스를 확인하느라 새벽 혹은 아침까지 잠을 설치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가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계엄 선포 157분만에 새벽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오전 4시 30분 현재 윤석열 대통령은 결국 선언 약 6시간만에 국무회의를 통해 계엄을 해제할 것을 선언했습니다(링크).

‘다행이다’라고 하기엔, 그 자리를 버티고 빠르게 모두를 위해 나서준 이들의 덕분이며 지난 역사를 잊지 않은 사람들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더 해야할 남은 절차 및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의 해찰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구자님께선 증오범죄라는 단어를 신문 등에서 접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근 수 년 간 ‘증오범죄Hate Crime’는 전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증오범죄란 특정 집단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벌어지는 범죄인데요. 이는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대한 위협이 되기도, 혹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테러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fig.1> 특정 집단, 인물에 대한 증오, 편견이 원인이 되는 '증오범죄'는 점차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증오범죄'는 단순히 '증오가 많아서' 생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증오범죄의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요? / Unsplash

그런데 저는 꽤 옛날부터 신문, SNS 등에서 ‘증오범죄’라는 단어를 볼 때 줄곧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증오 범죄자의 범죄에서 ‘엄청 싫어하는 감정’이 [진짜로] 중심 원료가 되는지에 대해선데요.

‘무지 싫어하니까 해쳤다’라는 말은 관습적 동어반복에 가까울 뿐 구체적인 이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싫어하니까 해친다’라는 말을 마치 ‘밥이 있으니까 먹는다’ 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싫어하면 당연히 해치고 싶은 걸까요? 대충 싫어하면서도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정도로 싫어야, 자신의 삶을 망치면서까지 누군가를 해치고 싶어지는 걸까요? 그건 정도의 문제일까요? 무엇보다도 특정 타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무차별 증오범죄’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게다가 애초에 어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삶을 뒤바꿀만한 선택을 할 호오(好惡·좋고 싫음)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평생 좋아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도 드문데, 누군가를 ‘무차별로’ 해칠 만큼 싫어하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정당화하고 위험을 감내할 정도의 신념이 생기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증오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그만큼 강력하고 확고한 증오의 신념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까요? ... 차라리 무엇이 있음보다도 없음의 측면에 주목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이때문에 저는 차라리, ‘증오범죄’를 ‘증오가 있음(+)’의 측면이 아니라, ‘무언가가 빠져있음(-)’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 조금 더 사태의 본질에 맞는 게 아닐까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유머의 부재입니다.

얼핏 ‘증오범죄’와 ‘유머’를 붙여놓는 것이 외람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 이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나마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요.

이에 이번 레터에서 저는 ‘증오’와 ‘유머’에 대해 해찰을 해볼까 합니다.

살만 루슈디의 <나이프Knife>와 <유머란 무엇인가>(테리 이글턴), <웃음의 철학>(만프레드 가이어) 등을 지팡이 삼았습니다.

【2.증오범죄를 과대평가 말라】

“그(범죄자)는 터무니없게도 거의 사랑스러울 만큼 어려 보였다. 그의 침착한 태도를 통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난 내가 올바른 일을 했다는 걸 알아,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한테 관심 없어, 라고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살만 루슈디, <나이프> 中

2022년 8월 12일, 한 70대 소설가가 단상에 올랐습니다.

곧이어 한 젊은 남자가 칼을 쥔 채 재빠르게 단상으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단상 위에 있던 이를 무참하게 수십번 찔렀습니다. 그는 얼굴, 가슴 등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쪽 눈을 잃고 한 때 죽음의 문턱까지 갔어도, 가까스로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악마의 시>(1988)를 쓴 이후 이란 최고지도자의 사형 칙령(파트와)을 받고 극단주의자들에 반평생 목숨을 위협당해온 인도 출신 소설가 살만 루슈디의 실제 이야깁니다.

<나이프Knife>는 살만 루슈디가 2022년 뉴욕의 한 강연 행사에서 피습당한 경험을 직접 쓴 충격적인 책인데요.

이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이중의 충격’을 주는데, 먼저 그런 처참한 일이 일어났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인데다가 심지어 자신이 칼을 직접 맞던 순간까지 묘사한 글을 ‘본인이 직접’ 썼다는 것 (비교적 담담하게) 역시 충격적이라고 할 만합니다.

<fig.2> 2023년에 촬영한 살만 루슈디의 사진. 그는 2022년 피습으로 인해 한쪽 눈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왼쪽) 그가 피습 경험에 대해 쓴 책 <나이프> 책 표지. 이 책의 영어 부제는 '살인미수 이후의 명상Meditations After an Attempted Murder'입니다. / Newyorker(링크), 문학동네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보였다. 불분명하게 들렸다. 소음이 많았다 […] 소란스러운 인간 돔이 나라는 취약한 형체를 에워싸고 있었다 […] 이상하게도 내게는 고통의 기억이 없다. 충격과 당황스러움이 고통에 대한 인식마저 압도한 걸까? […] 아, 나는 생각했다. 내 멋진 랄프로렌 정장.

-살만 루슈디, <나이프>(이하 동일)

저자는 자신이 칼에 찔리기 전의 일상부터, 피습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신체적·정신적 회복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았습니다. 책 집필은 그에게 있어 상처의 극복, 일상을 되찾는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죠.

제가 이 책을 오늘 레터에서 가져와본 이유는, 살만 루슈디가 우리가 간과하곤 하는 ‘증오범죄’의 본질을 꿰뚫고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이프>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루슈디가 피습당한 이후 자신을 찌른 ‘범죄자’의 동기를 탐구해가는 대목입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데 성공할뻔한 청년의 마음 속 깜깜한 우물을 들여다봅니다. 하지만, 저자는 청년의 마음 속에서 ‘어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죽일 만한 맹렬하고 올곧은 증오, 논리, 거창한 신념’을 찾지 못합니다.

단지 그가 발견한 건 ‘텅 빈 우물’, 그 뿐 이었죠.

* 그는 내 작품을 ‘두쪽’ 이상 읽어본 적이 없었지만 유튜브에서 내가 강의하는 영상을 보았고 내가 ‘부정직’하다고 결론내렸다 […] 그가 한 말을 읽고 나서 내가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나를 죽이겠다는 그의 결심에 동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 거의 살해당할 뻔한 사람이 거의 살인을 저지를 뻔한 사람에게 “그보다는 나은 이유를 생각했어야지”라고 꾸짖는 것은 이상하지만, 바로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었다.

* 스물네살 나이에 이미 인생에, 어머니에게, 누이들에게, 아버지들에게, 복싱에 재능이 없다는 점에, 그 무엇에도 재능이 없다는 점에 실망한 네가 눈에 들어와. 앞에 펼쳐진 황량한 미래에 실망했고. 너는 스스로 초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 하지만 누군가를 탓해야 했어. 정말 많이 탓하고 싶었겠지. 그 모든 헐거운 비난이 네 온몸과 주변에 흘러넘쳤고, 그때 트윗이든 영상이든 무언가가 일생의 모든 비난을 내 쪽으로 돌린 거야. 그렇게 그 비난이 내 머리에 내려앉았고, 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지.

모두가 이 사건을 두고 전형적이고 악랄한 ‘증오범죄’라고 외칠 때, 저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건 이후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그를 죽이려고 했던 범죄자는 아랍계 미국인 20대 청년으로, 루슈디의 책은 ‘두 쪽’만 읽어봤을 뿐이었습니다. 한때 복싱을 하다가 실력 부족으로 좌절하고, 친구나 가족과의 교류도 전혀 없이 4년 간 집의 지하실에 틀어박혀 극단주의자 유튜브를 보며 망상에 빠지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느날 유튜브에서 루슈디가 강연하는 영상을 봤는데, 그걸 보고 “부정직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냥 죽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거죠. 평생 루슈디와 직접 대화해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를 직접 대면한 것은 단상 위에서 그를 찌르는 순간인 약 이십칠초 정도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범죄자의 악마같은 잔인무도함에 분개했습니다. 루슈디에 연대하기 위해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링크) ”처럼“나는 살만이다!”를 분연히 외치기도 했죠.

<fig.3> 가해자 청년 Hadi Matar 사진 (왼쪽) 지하드(성전)에 참여하는 카슈미르 젊은이를 공감하는 시각으로 그려낸 살만 루슈디의 소설 <광대 샬리마르> / AFP, 문학동네

하지만 저자는 반발합니다. 이건 거창한 심판 같은 게 아니고, 가해자는 무시무시한 악당 같은 게 결코 아니라고요.

“내가 살만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놈에게 그렇게 큰 힘을 부여하지 말아요, 수잔. 우리는 그렇게 쉽게 박살나지 않습니다. 그놈이 파멸의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말아요. 그놈은 그냥 운이 좋았던 멍청한 광대일 뿐이에요.

루슈디는 그 청년에게서 결여된 수많은 가치들(진취성, 신념, 균형, 성찰하는 습관, 현실감각 등)을 발견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루슈디가 결정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유머의 결핍’입니다. 그는 장장 6회차에 걸친 청년과의 ‘가상 대화’ 속에서 결국 청년의 ‘유머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와의 대화를 끝맺습니다.

그 책(<악마의 시>)을 둘러싼 논란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다툼으로 보는 거라고. 이젠 너를 알겠어. 나의 실패한 살인자, 위선적인 암살자. 몽 샹블라블, 몽 프레르(나의 동포, 나의 형제여).

넌 웃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살인을 시도할 수 있었어.

【3.유머와 불완전함 : 우리 모두 원래 좀 바보다】

궁금해집니다.

왜 살만 루슈디는 마지막으로 가해자에게 ‘유머’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을까요? 다른 수많은 것들도 아니고 굳이, 콕 찝어 유머를요.

우리는 평소 유머의 중요성을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많은 철학자들은 ‘웃음’과 ‘유머’를 진지한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아왔습니다.

이는 유머가 단순한 사치품이나 쓸모없는 장난감, 잉여 같은 게 아니라 - ‘인간성의 핵심’과도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웃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그런데 유머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웃음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영국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은 <유머란 무엇인가>에서 유머의 역사와 맥락을 입체적으로 사려깊게 살펴보는데요.

물론 유머에도 수많은 종류가 존재하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을 통틀어 좋은 유머가 갖는 공통분모라고 할 만한 것은 꼽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 “유머는 인간은 모두 원래 쫌 바보다!”라는 걸 새삼스럽게 알려준다는 겁니다. 횡경막을 격렬하게 떨게 하며, 꽤 유쾌한 방식으로요.

<fig.4> <유머란 무엇인가> 책 표지 (왼쪽)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서 공장노동자인 채플린이 정신없이 나사를 돌리다가 미쳐버린 뒤 공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리는 장면. 책임자가 와서 문책하니까 나사를 돌리듯 코를 비틀어버립니다. 코미디의 등장인물들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바보'인 경우가 많습니다. / 문학사상, Charlie Chaplin 공식 유튜브(영상)

당연히 누군가에게 ‘바보’라고 하는 건, 상대방에게 있어선 깜짝 놀라고 낙담하게 되는 일이긴 합니다.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죠.

하지만 여기서 핵심은 네가 바보니까 넌 쫓겨나야 해! 가 아니라, ‘우리 모두 원래부터 바보니까 좀 불완전해도 괜찮아. 우리 피차 바보끼리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고’라며 으쓱대는 장난기에 가깝다는 거죠.

윈덤 루이스는 “모든 인간은 하나같이 ‘인간’처럼 행동하는 ‘물物’ 즉, 몸이기에 필연적으로 웃기다”라고 논평했다 […] 우리는 심지어 농담을 하기 전부터 웃기는 생명체들이다 [...] 조지 오웰은 “농담의 목적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원래부터 이미 우스꽝스러웠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테리 이글턴, <유머란 무엇인가>

이처럼 유머는 ‘억지 공격, 비하’라기보다는, 우리가 애초부터 바보인 걸 ‘드러내는’ 것이 핵심입니다.

옛날부터, 수많은 유머들의 핵심은 주로 사람들의 어리석은 부분을 놀리고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평소 진지하고 젠체하는 권력자일 수록 놀리는 재미가 있었죠. 그들도 결국 ‘사회적 자아’라는 껍데기를 벗으면 바보같은 건 매한가지니까요.1)

전해져오는 농담집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그리스의 깔깔농담집’ <필로겔로스>(서기 약 3~4세기 경 채록)의 주된 농담들은 가장 젠체하는 엘리트들,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을 소재로 한 것들이 많았습니다.2)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 있었죠.

* 잠을 자는 동안 자신의 모습이 봐줄만한지 어떤지 궁금했던 한 스콜라 철학자는 눈을 감고 거울을 들여다봤다.

* 한 스콜라 철학자가 지인을 만나서 말했다.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러자 그 지인이 대꾸했다.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그러자 스콜라 철학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자네가 죽었다고 전해준 사람은 자네보다 훨씬 믿을 만한 사람이었네."

-히에로클레스, <필로겔로스philogelos; Φιλόγελως> (*만프레드 가이어, <웃음의 철학>에서 재인용)

풍자는 꼭 특정 계급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습니다.

유머는 우리가 평소 두려워하는 상황에 대한 것(죽음, 실패, 소외, 좌절, 실수 등)을 소재로 웃게 함으로써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삶의 진리를 파악하고, 또 약간의 긴장을 풀 수 있도록 하기도 했죠.

* 몇 분 간격으로 레버 누르는 일을 하던 공장 직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여러 해가 지난 뒤 이 작업을 하던 직원은 레버가 아무데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크나큰 충격에 빠져 고통스러워한다.

이 일화에서 가장 심란한 측면은 얘기 자체가 약간 웃기다는 점이다. 의미의 부담에서 놓여나면 우리는 상황의 부조리함에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즐거워한다.

* 죽음과 대면하여 웃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유한성을 가벼이 여김으로써 얻게 되는 모종의 즐거움도 있다. 죽음을 가지고 농담하면서 죽음의 콧대를 꺾어놓고,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무시무시한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환자: 제가 얼마나 살 수 있나요?

의사: 10입니다

환자: 10이라고 하시면? 10년? 10개월? 10주?

의사: 아뇨, 10, 9, 8, 7…”

이런 유머는 때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우리가 평소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강제로 웃음을 터뜨리게 함으로써 ‘별 것 아니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거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있듯이 - 우리가 아무리 복작복작 신경을 쓰고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산 꼭대기에서 보는 순간 그냥 복작복작한 개미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쫌 바보다’라는 말에서 반드시 간과해선 안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너’만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불완전합니다.

만약 ‘나’만 완벽한 정의의 사도이고, ‘너’만 불완전하다고 하면 우리는 상대의 결점에 대해 유쾌하게 놀리고 웃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보다는 화가 나겠죠. ”왜 너만 이 모양이야!“하면서요. 그런데 오늘날엔, 이런 식으로 ‘나’ 역시 바보라는 인식을 빼놓고 ‘너’만 바보라는 식으로 조롱하고 공격하는 유머가 많습니다.

<fig.5> '나'와 '너'가 서로 조금 '못난놈'이라는 걸 인정하면 유쾌해집니다. 하지만 만약 제목이 <너만 못난놈이다>면 과연 웃을 수 있을까요? 유머를 진지하게 다룬 많은 학자들은, 모든 유머가 결코 같지 않으며 - 자기객관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유머는 저열하다며 비판해왔습니다. (왼쪽) 남아공 출신 스탠드업코미디언 트레버 노아. 그는 사회풍자적인 코미디를 하면서도 자신의 출신, 인종 등 민감한 자신의 문제 역시 우스개로 다루곤 합니다. <태어난 게 범죄>라는 책 제목도, 남아공에선 엄격한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해 흑인과 백인의 결혼은 범죄였기 때문에 이를 풍자한 것이죠.(그의 아버지는 백인이고 어머니는 흑인입니다) / 문학의문학, 부키

저자에 따르면 이런 유머는 장난할 수 없는 실패한 유머이고, 단지 상대를 향한 공격의 수단이 될 뿐입니다.

* 홉스는 나아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과도한 취향은 소심함의 징표이기에 지탄받을 일이라고 주장한다. 위대한 이들은 남을 조롱하지 않으려고 분투한다. 본인과의 비교 대상은 오로지 가장 유능한 자들뿐이다.

홉스는 이 지점에서 우월 이론*의 역설 가운데 한 가지를 간단하게 언급한다. 즉, 남이 열등하다고 비웃는자들은 그저 자신의 도덕적 초라함을 입증할 뿐이라는 것이다.

*우월 이론 = 웃음의 여러 이론 중 하나로,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확인할 때 웃음이 나온다는 것

* 본인의 약점을 인정하면서 고통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과 정반대 지점에 있는 것은 타인의 결함으로 추정되는 것들을 조롱함으로써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희극적 오용에 이르게 되는 상태다.

자기 자신이 당황하고 쩔쩔매는 모습에서 진정으로 재미를 발견하려면 어느정도 자기 통찰과 극기가 필요하다. 반면, 남을 비웃는 행위는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자신의 불안을 부인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감상벽이나 방종의 형태가 아니라 본인의 고난과 시련을 직면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어서 좋은 훈련이 된다. “타인의 고통을 웃음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고통을 눈물로 표현해야 할 만큼 그렇게…남들이…두려운가요?”라고 워터스(*트레버 그리피스 희곡 <코미디언들> 속 등장인물)는 질문한다. “진정한 코미디언이란 다름 아닌 대담한 사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을 읽으면서, 큰 느낌표가 떠올랐는데요.

어쩌면 ‘자기비하’3)란 유머의 한 장르나 특성이라기보다는, 좋은 유머의 필수 조건(좋은 유머와 나쁜 유머를 가르는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비록 직접 자기비하를 내용이나 소재로 하지 않더라도, 옛날부터 제가 편하게 웃으며 볼 수 있었던 유머들의 공통점을 곰곰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청중을 죄다 놀리려고 하는 ‘자신’ 역시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는 코미디언들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거든요. 그런 사람이 나를 심하게 놀려도 저는 함께 배를 잡고 깔깔 웃을 수 있었습니다.

좋은 유머에서라면, 이처럼 ‘우리는 모두’ 바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비관주의가 아닌데, 왜냐면 애초에 사람은 불완전한 게 당연하니까요.

1) 어쩌면 권력자와 공식적인 바보(?)의 유일한 차이는, 평소 권력자는 바보가 아닌 척 하고 다닐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권력자의 바보같음은 놀림당하고 드러나지 않는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더 큰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점 정도일지도요

2) "특기할 만한 것은 <필로겔로스>라는 이 농담집에 “스콜라 철학자”에 관한 위트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스콜라스티코스라는 용어는 원래 매우 진지하고 깊이 있게 강의하는, 학식이 높고 똑똑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그리스인들조차 일찍이 스콜라 철학자들을 최대의 멍청이로 간주했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 만프레드 가이어, <웃음의 철학> 중

3) '자기비하'라고 쓰긴 했습니다만, 핵심은 자신의 단점과 편견, 컴플렉스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객관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4.유머와 연민 : 장난칠 수 있다면 증오하지 않는다】

이처럼 유머는 기본적으로, 너도 나도 우리 모두 조금씩은 (개성적인 방식으로) ‘바보’라는 합의가 핵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게 유머를 통해 우리가 ‘모두 제각기 개성있는 바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에게 훨씬 더 관대해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겁니다!

‘연민’의 기초인데요.

만약 어떤 사람의 불완전한 점, 단점을 ‘제각기 불완전한 모습의 한 단면’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들은 더이상 증오하기 어렵게 되죠. 장난을 치고 서로 놀리기를 주고 받다보면 우리는 제각기 어느정도 불완전하고 바보같은 사람들에게 가끔 놀리고 꿀밤을 주고 싶어질지언정, 대부분의 경우 그를 진심으로 증오하며 범죄를 저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거리두기는 일종의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 어떤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면 긴장이 풀리기도 하는 바, 타인에 대한 연민은 바로 이러한 긴장의 이완에서 흘러나올 수 있다 […] 내 상황이 더이상 그렇게까지 급박해보이지 않으면서, (똑같이 얄팍한) 타인들의 상황에 더 자유롭게 반응하게 된다 […] ”아, 헛되고 헛되도다! 이 세상에서 누군들 행복하랴? 누군들 욕망을 가졌으며, 설령 욕망을 가졌더라도 누가 만족하랴?…”

어차피 나도 너도 한 몇십년 아등바등 밥과 잘곳을 구하며 분주하게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개미같은 존재들이니까요.

우리가 서로의 불완전함을 바탕으로 ‘연민’한다면, 우리는 훨씬 깊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이해해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단순한 이유로 상대방을 혐오하고 배척하지 않고서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좀 짜증이 날 수는 있습니다. 상대방도 불완전하니까요. 그럴 때 자신도 불완전하고 웃긴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을 증오하는 대신 조금 짖궂게 놀려주고 괴롭혀주고 싶을 뿐입니다.

<fig.6> 요하너스 모레일서, <데모크리토스, 웃는 철학자>(1630)가 그려진 <웃음의 철학> 책 표지 (왼쪽) 빌란트가 쓴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 속 작품인 '당나귀 그림자 재판Der Prozes um des Esels Schatten'을 상징하는 당나귀 조각품. 작품 속 압데라 사람들은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일을 하는 이들로 그려지고, 데모크리토스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꾸짖고 웃습니다. / 글항아리, Geograph Deutschland

독일 작가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는 ‘미친 소크라테스’라 불리던 압데라 출신 견유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과 그가 살았던 마을을 소재로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라는 소설을 썼는데요.
*데모크리토스(기원전 약 460년~ 약 380년) = 원자설의 창시자이자 자유로움과 기행으로 유명한 압데라 출신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 '웃음의 철학자'로도 불립니다.

생전 데모크리토스는 기행으로 유명했던 만큼, 압데라에 살던 시절 주민들과 마찰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갑자기 소리를 지르거나, 막대기를 휘두르고, 꾸짖고, 길바닥에 누워있거나 했던 것이죠.

압데라 사람들은 이런 데모크리토스를 증오하고 죽이려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압데라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를 좀 ‘기이한 바보’라고 생각했고, 그 뻔뻔한 철학자가 만약 자신들을 향해 훈계를 늘어놓고 꾸중을 한다면 오히려 말을 안 듣고 더 나쁜짓을 함으로써 데모크리토스를 약 올리고 복수했죠.

하지만 이렇게 약을 올리고 일부러 놀리고 복수를 하려고 해봤자 데모크리토스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증오’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바보짓에 웃기만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서로 잔뜩 놀리기만 한 거죠.

“압데라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스러웠다고 해도 악의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들과 함께 살았다면 호머의 네스토르만큼 오래 살았을 것이다. 압데라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기이한 바보로 여겼을 테고, 바보스럽게 보이는 그의 행동을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향은 독배를 마시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들을 꽤 날카롭게 비판했으나 그들은 그를 견뎌냈다. 아마도 압데라 사람들보다 덜 친절한 민족이었다면 인내심을 잃었을 것이다 [...] (압데라 사람들은) 그(데모크리토스)의 모든 말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그가 권고한 것과 다르게 행동함으로써 그에게 복수했다 […] 그들은 이 지혜로운 원칙에 입각하여 잇따라 바보짓을 저지름으로써 그가 불쾌함을 느낀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빗나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데모크리토스는 그들의 바보짓에 웃기만 했을 뿐 그들의 장난질에 화를 낸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때때로 큰소리로 외치곤 했다 ‘압데라인들이여, 압데라인들이여! 그대들은 <나에게> 고통을 주리라는 희망으로 스스로의 뺨을 때렸노라!”

-크리스토프 마르틴 발란트,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만프레드 가이어, <웃음의 철학>에서 재인용)

데모크리토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단지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증오의 대상이 되고 독배를 마시고 죽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압데라 사람들은 데모크리토스를 그냥 ‘바보’라고 여기고 놀렸을 뿐입니다.

발란트는 만약 소크라테스가 압데라에 살았다면, 그냥 “기이한 바보”로 여겼고 오래 살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데모크리토스쪽 역시 어리석은 압데라 사람들을 향해 '진심으로 혐오, 증오'하기보다는 웃고 넘겼을 뿐입니다. 증오는 ‘독’ 같은 것이라, 당하는 사람 뿐 아니라 그것을 담고있는 사람을 망치기 때문이죠.

이상이 바로 발란트가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에서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자, 제가 오늘 레터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핵심입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압데라 사람들에 가까울까요? 아니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그리스인들에 가까울까요?

【5.맺음말】

오늘 레터에서는 이상, 웃음과 증오범죄라는 다소 동떨어져보이는 두 단어에 대해 해찰해보았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처음 준비할 때 저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마치 증오범죄라는 중대한 사건을 ‘유머’나 ‘웃음’과 함께 다룸으로써 별것 아닌 것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레터를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저는 오히려 처음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유머가 없는 삶’이 가져오는 문제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노잼’의 문제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과 단점을 어떻게든 결코 웃어넘기지 못합니다. 그렇게 모든 사소한 것들은 모두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고, 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는 서로를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몰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사회에서는 본인의 단점 역시 웃어넘기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유머의 부재란,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도 자신과 타인에게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 의외로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일지도 모릅니다.

✏️

“나는 인간의 내면에는 비참함보다 허영이, 비열함보다 무지가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악으로 가득채워져 있다기보다는 공허함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가련하기도 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기도 하다 […] 인간의 특수함은 그가 웃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우스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 몽테뉴, <수상록>

※레터를 쓰며 읽은 책,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들이 추가로 읽을만한 서적 등을 추천합니다.

살만 루슈디, 강동혁 옮김, 『나이프』, 문학동네, 2024.

-레터에서도 소개했듯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처음 이 책의 소개를 보고 나서부터 왠지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과연 얼마나 담대해야 자신이 수십번 칼에 찔리고, 또 죽을 뻔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게 되는 걸까요? 어떻게 40년 간 살해 협박을 받아오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힘은 결국 본인의 굳건함에서도 오겠지만,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테리 이글턴, 손성화 옮김, 『유머란 무엇인가』, 문학사상, 2019.

-영국의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이 쓴 유머에 대한 책입니다. 유머에 대한 분석을 '죽은 개구리 찌르기'라고 부르기도 한다는데요. 이유는 '잘 된 유머는 그냥 웃길 뿐' 그게 왜 웃긴지를 분석하려고 하는 순간 이미 죽어있는 개구리를 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굉장히 사려깊고 입체적으로 유머의 본질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 레터에서는 맥락을 충분히 소개하진 못했지만, 결국 이 책의 결말부에서 테리 이글턴은 지나치게 '정치적인 도구화된 유머'에 대해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냅니다. 유머의 본질은 카니발에 가깝고, 그 자체의 힘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방향으로만 양떼몰듯 이끌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우리가 '그냥 웃기다'는 데 동의하는 유머들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레터에서 다루어 보았습니다.

만프레드 가이어, 이재성 옮김, 『웃음의 철학』, 글항아리, 2018.

-데모크리토스 등을 중심으로 서양에서 철학자들이 어떻게 웃음, 유머를 다루어왔는지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이 책에 소개된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 책은 굉장히 흥미로웠는데요. 물론 발란트가 그 작품을 썼던 시점 기준으로도 다소 이상적으로 그려낸 과거의 모습이긴 했겠지만, 그럼에도 오늘날 과연 저런 식으로 (재밌게) 서로 간의 불화를 푸는 경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책 속 인용을 읽는 내내도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압데라 사람들에 대하여> 속 데모크리토스가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들을 증오하는 대신 웃어 넘긴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는데요. 실제로 세네카 등은 '분노'를 가장 위험하고 스스로를 망치는 감정이라고 하며, 차라리 분노 대신 웃는 편이 평정을 이루는 데 좋다며 웃음을 권하죠. 그런데 저의 경우만 보더라도 어떤 바보같은 일을 보고서도 웃기보다는 화를 내는 데 더 익숙해져왔던 것 같습니다.

【글 속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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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으로서의 웃음

독서시간: 약 5분 / 글자수: 약 2500자

🖍글 속 한 문장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는) 인종 간 결혼 자체가 불법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카사족 흑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도를 뛰어넘어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위스 사람들이 초콜릿을 워낙 좋아하잖아요.'
아슬아슬하다 [...] 트레버 노아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던 자신의 아픈 정체성을, 시대와 사회의 억압을, 박장대소하는 유머로 만들어 낸다. '길을 가다 경찰이 나타나면 엄마는 제 손을 놓고 이렇게 말하곤 했죠. 몰라요. 제 애가 아니에요.' 익살스럽게 엄마의 말투를 묘사하는 트레버 노아를 보면서 나는 유튜브 속 청중들과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웃다가 나는 문득 그의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는 스스로 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에 웃는가?”

👤김스피의 블라블라

'웃음'의 복잡성에 대해 다룬 백승주 교수의 칼럼입니다. 본문에서도 소개했던 코미디언 트레버 노아의 사례가 인상적인데요. 어떤 코미디언들은 '굳이' 자신의 기구한 삶과 정체성을 웃음거리로 만들며 유머를 구사합니다. 그런 코미디를 보면서 우리는 "아슬아슬해!"라고 외치며 손에 땀을 쥐지만, 묘하게도 그 아슬함이 없는 유머는 시시하거나 더 나쁜 경우엔 분통이 터질 뿐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아슬함을 좋아하는 걸까요? 그리고 어떤 종류의 유머는 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걸까요? 예를 들면 과거 수해복구 현장에 가서 "솔직히 비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나오게"라고 말한 한 국회의원의 농담(?)같은 것이요.

막말은 과연 효과적인가?

독서시간: 약 2분 / 글자수: 약 1000자

🖍글 속 한 문장

“웃음을 일으키는 것이 연설가의 일임은 당연하네. 호의를 얻고자 하는 이에게 호감이 생기게 하는 것이 실은 즐거움이네. 어떤 사람이든 대개 답변하는 사람이 내놓은 한 단어에 담긴 예리함에 감탄한다네. 물론 때때로 날카롭게 공격하는 사람의 한마디도 그렇다네. 웃음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고 저지하며 가볍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며 반박한다네. 또한 연설가를 세련되고 교육을 잘 받았고 기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드러내 준다네. 특히 엄중함과 가혹함을 부드럽게 만들며, 종종 아주 곤란한 상황을, 이는 말의 논리로는 쉽게 풀 수가 없는데, 이런 상황마저도 유머와 기지로 완화시켜 버린다네.”(키케로의 <연설가에 대하여> 2권 236장)

👤김스피의 블라블라

정치인들의 '막말'은 매번 에 뜨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막말은 진짜로 '상대방에게 내가 의도한 효과를 낸다'는 측면에서 효과적인 걸까요? 당연하지만 말을 할 땐 그 말을 통해 내가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감정과 영향을 불어넣는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유머는 꼭 정치인 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다양한 측면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입니다. 특히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끼리 모여 무언가를 할 땐 말이죠.

웃음이 글말이 될 때 : 일베와 조롱

독서시간: 약 6분 / 글자수: 약 3200자

🖍글 속 한 문장

조롱하고 냉소할 때 우리는 불합리한 세계를 전복시켰다는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웃음은 아무것도 뒤집지 못한다. 그간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웃음을 한걸음 떨어져서 회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 대신 그 웃음이 주는 가짜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일베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제 일베의 웃음은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일베의 현신으로 여겨지는 젊은 정치인은 '자기 정치'를 '이죽거림'으로 대신한다.

현실을 돌아본다. 정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는 조롱과 냉소만 가득하다. 세상은 정말로 망해가는데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차가운 웃음만 던지고 있다.

👤김스피의 블라블라

위에서 소개한 칼럼(백승주 교수)의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원래 위에 링크만을 붙여 소개할까하다가, 2편의 내용이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을 소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별개로 소개합니다.

유머는 기본적으로 '놀자!'라고 권유하는 행동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썰렁유머'라고 해도 강의실에서 선생님이 한마디 던지시면 졸다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게 되곤 하죠.(가끔 졸다 깨서 내용을 몰라도 그냥 옆 친구들이 웃으니까 따라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유머가 얼굴을 보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입말'), '글말'로 -비대면으로 행해진다면 그것은 여전히 같은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실 글말이냐 입말이냐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공동체의식이나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게 되는가가 핵심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 레터를 쓰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다시 이 문제에 대해 깊이 다뤄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네요.

‘선 넘는 유머’? 웃음과 표현의 자유

(지난레터)

🖍글 속 한 문장

일본의 스탠드업 코미디언 야나가와 사쿠의 꿈은 일본 최고의 무대 부도칸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서 굳이 미국이 아닌 일본에서 활동하려는 이유는 일본을 서로 다른 의견의 소통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사회로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 서로 웃지 않아요. 저는 스탠드업 코미디가 일본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민감한 이야기들을 '링 위'로 올리고, 더 많은 것에 대해 왁자지껄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려져 있는 한 해결될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으니까요.

👤김스피의 블라블라

인스피아의 비교적 초기에 쓴 레터이지만, 이후 레터에서도 종종 관련 이슈가 있을 때 소개해서 보신 분들이 계실텐데요. 이 레터는 쓰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레터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레터에서 썼듯, (비록 저 자신은 노잼인 편이지만) 코미디를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기지넘치는 위트, 선 넘는 유머를 통해 통렬하게 사회적 현상을 꼬집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선을 아슬아슬하게 잘 넘는' 코미디언을 좋아했죠.

그런데 과연 '선 넘는 유머'를 잘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아할까요? 당시엔 그저 막연하게 '잘' 해야 한다 정도로 생각했지만, 오늘 레터를 쓰면서 어쩌면 그 핵심은 레터에도 썼듯 '자기객관화'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유머 외에도 글쓰기 등에 있어서도 자기객관화가 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잘쓴 글과 읽기 힘든 글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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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차(‘소음 속을, 분투하며 산책하기 : 도시와 SNS [11월의김스피]’)에 대한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모아 소개합니다. 편지로 다양한 의견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버튼을 누르면 연구자님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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