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파스칼은 인류의 비참함의 원인을 ‘지루함’으로 꼽기도 하죠. 만약 사람이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이불 밖으로 나올 필요’ 가 없었을텐데, 굳이 지루함을 이기기 위해 싸우고 힘든 일을 만들었다는 차원에서요.

“인간의 불행은 누구라도 방에 꼼짝 않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저 방에서 가만히 있으면 좋으련만, 당최 그러지를 못한다. 그래서 굳이 스스로 불행을 초래하고 만다.”-블레즈 파스칼, <팡세>

오늘날엔 많은 사람들이 배고픔 등 생존의 큰 위협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지루함은 더 커져갑니다. 사람들은 안간힘을 쓰며 자신이 무언가 몰두하고 좋아할만한 것을 찾아다니죠. 뭐든 그저 지루함이라는 지긋지긋한 숙명을 잊어버릴 수 있다면 되는 겁니다. 이런 지루함을 ‘풍요의 역설’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저자는 머릿말에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몇 장면을 소개하고 있는데요. 그중 ‘어떤 축구팬’의 사례가 눈에 띄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그는 경기 상황에 일희일비하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슈팅이 벗어나면 낙담하여 한숨을 크게 쉬었고,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상대진영을 돌파하면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이상한 점은 그가 즐거워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 주위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뭐랄까, 자신을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지금 축구 경기에 열중하고 있어”라며 주위에 힘껏 호소하는 듯 보였다.

-고쿠분 고이치로,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이하 동일)

“지금 수백만에 달하는 유럽 사람들은 지루함으로 죽어버릴 지경이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무엇에 의해 괴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들은 그러한 괴로움 속에서 행동하기 위한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1822)

사람들은 이런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에 대단히 몰두하기로 결심하기도 합니다.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이니까 좋은 것일까요? 고쿠분 고이치로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일상적인 일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 말이다. 이는 결국 자신과 마주할 기회를 잃어가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일상적인 일의 노예가 될까? “아무튼 그냥 지루해”라는 목소리에서 도망치고 싶기 때문이다.”2)

고쿠분 고이치로는 가장 먼저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맛좋은 요리를 ‘잘’ 먹기 위해선 요리에 대한 것을 조금 알아야 하듯이요. 이와 관련해 버트란드 러셀은 “예전에는 교육이란 다분히 즐기는 능력을 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저자는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신다. 그러나 진정으로 먹지 않는지도 모른다[…]우리는 먹는다는 행위가 가능해지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전문학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부가 필요하며, 그리스어를 읽을 수 없으면 그리스어로 쓰인 고전 문학은 즐길 수 없다[…]그림이 등장하게 된 역사를 안다면 추상화를 즐길 수 있다. 음악 또한 마찬가지다[…]즐기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은 향유 대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확장한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며, 예전에 <스우파>가 끝나고 난 뒤 한 댄스채널에서 댄서들의 춤을 분석해주던 유튜브를 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춤알못이기 때문에 그냥 ‘엄청 멋지구나’하면서 압도되며 봤을 뿐입니다만, 그 분석을 보고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대단하다는 걸 조목조목 알게되니 몇배로 더 댄서들의 춤을 깊이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외칠 수 있습니다. “복잡한 것을 알아서 뭐해! 그냥 봐서 재미만 있음 되지!” 일리 있는 말이긴 합니다. 다만 대체로 복잡한 건 몰라도 그만이지만, 복잡한 걸 알기 때문에 훨씬 더 풍부하게 즐거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3) 아마 연구자님들께도 나름의 그런 분야가 하나쯤은 있으실텐데요. 이런 ‘덕질’을 위한 공부나 노력은 수고롭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더 기쁘게 합니다.

이 밖에도 ‘낯선 세계에 적응’하는 능력은 동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발달한 능력인데요. 이런 적응력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낯선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도 훌륭한 ‘기분전환’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주 낯선 나라에 훌쩍 가본다든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어본다든지 하는요.

실제로 유목생활을 하던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게 된 것은 ‘정착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굉장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정착을 함으로써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곡식을 쌓아둘 수 있게 되었지만, 유목 생활을 하던 시절 인류는 낯선 환경에서 계속 적응하며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죠. 그러고보면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겐 ‘유목 유전자’가 남아있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그리고 이런 ‘기분전환 꿀팁’은 신기하게도, 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1970년대 미국 경제학자의 한 저서의 핵심 메시지와도 긴밀히 이어집니다.

현대 경제학의 고전 티보르 스키토프스키의 <기쁨 없는 경제The Joyless Economy>(1976)의 부제는 ‘유례없이 풍족한 사회, 행복은 왜 작아지는가’입니다. 통상 고전 경제학에선 돈이 많고 풍족할수록 행복이 비례한다고 여겨왔는데요. 저자는 이에 적극 반대 입장을 내세웠죠.

스키토프스키는 고쿠분 고이치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루함(무료함)을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보았습니다. 쾌락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니고, 인간의 지루함을 이기기 위한 적당한 새로움과 낯섦, 도전정신, 번거로움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단지 생산성이나 돈만 고려할 게 아니라, ‘지루함을 없애줄만한’ 진정한 즐거움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키토프스키가 <기쁨 없는 경제>에서 ‘기분전환’의 핵심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문화(예술)입니다.

문화에서의 ‘새로움’은 우리에게 도전정신과 진정한 행복감을 주는데, 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진지한 음악과 가벼운 음악 사이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첫째, 진지한 음악에 포함된 더 큰 복잡성과 더 많은 정보량에는 방금 언급한 것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데, 가벼운 음악에는 그런 게 없다. 둘째, 바로 그 많은 정보량이 진지한 음악을 가벼운 음악보다 더 오래 반복해서 들을 수 있도록 한다. 진지한 음악의 정보량이 처음 들었을 때 우리의 뇌가 그 일부를 무시하도록 할 만큼 크기 때문이다[…]관련이 없는 정보를 무시하는 습관은 정보 처리 능력에 주는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즐거움을 최대화하기에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림에서 그것이 보여주는 것만 보고,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만 인식하려는 우리의 습성은 그 밖의 다른 모든 정보와 형태의 구조 및 양감, 그리고 색의 조합을 의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만 해도 자극을 즐기는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채 그런 즐거움의 원천이 박탈된 삶을 살아간다[…]새로움을 즐기는 일은 학습을 필요로 하고 새로운 것을 소비한다는 것은 숙련된 소비를 의미한다.”

-티보르 스키토프스키, <기쁨 없는 경제>

이런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저자는 소위 ‘대중예술’보다는 ‘순수예술’쪽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습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중예술’이 ‘저급하다’는 이유가 아니라, 대중예술은 새로운 자극이 부족해서 경제학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도전을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옮겨보자면, 가성비가 안좋습니다.

만약 우리가 집 책꽂이에 열 권의 책만을 꽂을 수 있다면, 역시 한번 보고 지루해져버리고마는 책보다는 여러번 보고 또 볼 수 있는, 그리고 볼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주는 책을 꽂고 싶을 것입니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벽에 걸 그림 등도 마찬가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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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는 책과 해피엔딩으로 끝날 게 뻔한 따분한 연극, 늘 듣는 너무나 익숙한 음악, 훨씬 약한 상대와의 카드 게임 등은 그다지 자극적이지 않다[…]거의 아무런 쾌감을 주진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책이나 연극, 미술작품 등 어떤 자극의 원천은 우리를 사로잡고 흥분시킨다…”

-티보르 스키토프스키, <기쁨 없는 경제>

그러던 어느날 이들의 집에선 프랑스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급히 피신해온 바베트라는 여인이 식모 살이를 하게 됩니다. 바베트는 12년간 살뜰히 목사 집 가족을 비롯해 가난한 동네 사람들을 돌보는데요. 어느날 바베트는 무려 1만 프랑이라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죠. 바베트는 ‘마지막 소원’으로 목사의 기일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파티를 베풀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매들은 ‘프랑스 출신’인 이 여인이 지나치게 기괴한 혹은 사치스러운 요리를 내놓아서 목사 가정의 위신을 깎을까봐 걱정하지만, 마지못해 그녀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만찬에는 평범해보이지만 깜짝 놀랄만큼 엄청나게 맛있는 음식들이 나오죠.

아래의 대목은 마을 사람들이 만찬을 즐기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인데요. ‘삶의 즐거움’ ‘사치(예술)가 가져다주는 지고지순한 행복감’을 묘사할 때 자주 인용되곤 합니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한때 서로를 욕했던 두 늙은 여인은 앙숙 같은 사이가 되기 훨씬 이전, 둘이 함께 견진성사를 준비하며 손을 맞잡고 끝도 없이 노래 부르며 베를레보그 거리를 돌아다니던 소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고.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그래요. 형제님. 이 세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해요.”

-이자크 디네센, <바베트의 만찬>

이렇게 평생 청교도적인 마른 빵 식사만 해오던 마을 노인들은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굉장한 진미를 맛보고는 어린아이같은 영혼이 되어 눈밭을 굴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자매들이 손님을 배웅하고 난 뒤 산더미같은 냄비더미에 둘러싸여 피곤해진 바베트를 발견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어떻게 만든 거냐고 묻자, 바베트는 복권 당첨금을 죄다 써버렸다고 실토하죠. 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술가인 바베트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베트는 알고보니 프랑스의 고급 식당에서 일하던 셰프였는데요. 돈이나 노력이 얼마나 들든 상관 없이 최고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 바베트의 기쁨입니다.

이런 바베트의 태도는 분명 ‘경제학적’ 차원에선 아주 바보같은 일입니다. 자기 돈을 죄다 써버린데다가, 본전을 거두긴커녕 맛좋은 식사는 전부 공짜였으니까요. 하지만 바베트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즐거움 -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엄청난 만찬을 누리고 진정으로 행복해졌습니다.

이 세상엔 수많은 바베트들이 있었습니다. 이 만찬을 집어먹기 위해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대체로 그냥 초대에 응하기, 그리고 낯선 음식을 환대할 용기, 약간의 마음쏟기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