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을 깨는 힘은 어디서 올까?

[2월의 김스피]

>2월 레터의 비하인드 : ‘프레임’을 깨는 힘은 어디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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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에 대한 레터는 흔히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능력’(=시험을 잘보는 능력) 외에도 아주 다양한 능력들이 존재하며 이런 능력들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왔다는 것을 짚어본 회차였고요.

‘프레임’에 대한 레터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프레임’ 속에 갇혀 현실을 보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짚어본 회차였습니다.

연구자님은 어떤 오래된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애초에 ‘고정관념’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사안에 대한 고정된 관념이라는 말을 품어 안고 있는만큼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보통 두 가지 경로로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첫째, 어떤 일을 직접 내가 맞닥뜨리고 겪는 직접 경험. 둘째, 책이나 영화, 이야기 등을 통한 간접 경험을 통해섭니다. 이중 우리가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후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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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간접 경험들을 하며 살아갑니다. 

트위터 등 SNS에서 보는 글, 썰들 그리고 인터넷에서 본 뉴스, 얼핏 스윽 훑어 본 블로그의 글, 유튜브, 드라마, 영화 시청 등이 모두 간접경험의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간접 경험’이냐는 것인데요.

무조건 간접 경험을 많이한다고 해서 거기에 비례해 새로운 생각을 많이 떠올리거나, 기존의 프레임을 깨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겠고요. (만약 무조건 많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 모든 종류의 큐레이션 레터를 다 보고, 모든 SNS를 다 살펴보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겠죠.) 사람에 따라 간접 경험을 얻는 경로나 방식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저의 경우에는 그간 인스피아에서 주로 ‘책’을 통한 간접 경험을 지팡이 삼아 해찰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간 저의 능력은 많이 부족하지만, 책을 읽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해찰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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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종종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SNS나 기사,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간접 경험을 얻을 수 있는 시대니까요. 무엇이든 검색만 하면 수많은 관련 자료를 얻을 수 있고, 심지어 이젠 AI 덕분에 굳이 ‘검색’을 하지 않아도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한 아주 많은 양질의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최첨단의 시대’에 굳이 서고 깊숙이 꽂혀있던 먼지 먹은 책들을 꺼내어 뒤적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을 읽으면, 유튜브를 뒤적이는 것에 비해선 왠지 좀 멋있어보여서?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새삼스레 궁리하며, 두 가지 정도로 답을 꼽아보았습니다. 

‘무엇을’과 ‘어떻게’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요.

첫째, ‘무엇을(무엇과)’입니다.

만약 책을 읽는 것을 ‘대화’에 비유해본다고 생각해봅니다. 간절히 궁금한 게 있어서 누군가에게 조언을 얻으러 간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만약 ‘프레임’과 관련된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다면 프레임에 대해 수십년간 궁리해온 인지언어학자, 그리고 한때 미국 공화당 대통령의 선거 전략을 짜고 연임에 성공하게 만든 프레임의 고수와 대화를 하는 것과 옆집 바둑이와 대화를 하는 것 가운데 어느쪽이 도움이 될까요? 

물론 바둑이와의 대화도 충분히 즐겁고 매번 쓸모를 생각하면서 대화를 하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어떤 주제와 관련해 진지하게 생각을 키워보겠다고 할 때 이왕이면 그 주제와 관련해 다양한 경험을 하고 치밀하게 고민을 해온 사람과 대화를 하는 편이 도움이 되겠죠. 책에서는 적어도 이처럼 특정 주제와 관련해 치열하게 자신 나름의 고민을 해온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접하기가 용이합니다.

아무리 인터넷의 시대라곤 해도 수십년치의 경험과 진정성 있는 고민이 녹아든 글의 무게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누군가 펼쳐보기 전엔 주목받지 못할 뿐입니다. 먼지 묻은 책장을 펼쳐보고는, 이런 말이 있었구나! 하면서 깜짝 놀라게 되곤 하죠.

지난 레터에서 읽어본 책들을 살펴보면, 내용과 관점엔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통점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으로 고민을 해왔던 저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첫째주 레터에서 다루었던 <흐르지 않는 시간을 찾아서>(오정숙,2022)에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이는 때로 돌봄 당사자의 의견에 반해 옳은 방법을 고민해야하는 현장 당사자의 체험이 아니라면 듣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만큼 돌봄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큰 가치가 있는 목소리입니다.

또한 유능한 정치 컨설턴트 프랭크 런츠의 <먹히는 말>은 제가 레터에선 다소 회의적으로 인용하긴 했으나, 아래와 같은 대목은 이 책이 꽂힌 마케팅 실용서가 주변 고만고만한 다른 책들을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밀도있게 자기 나름의 고민을 해온 사람들의 고민을 읽다보면, 단순히 이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 나 역시 나 나름대로 처한 상황에서 고민을 궁리해볼 수 있게 되는 힘이 있습니다. 과연 이처럼 어떤 주제에 대해 밀도있는 이야기들을 엮어 읽을 수 있는 글들이 어디에 모여있을까?라고 생각해보았을 때 그 답은 책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또한 여기서 자연스럽게 ‘어떻게’로 이어지는데요.

대화를 하긴 하되, 어떤 자세로 대화를 하는지의 문젭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과 대화를 하더라도 만약 한 시간 내내 졸거나 손 안의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다면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책을 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면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읽는 태도 역시 내용만큼이나 태도 역시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읽기의 태도와 관련해, 과거 이탈리아 시인 주세페 웅가레티는 아래와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에 대한 이야기지만, 저는 이것이 어떤 볼거리를 대하는 태도 전반에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1)

저는 통상 책을 읽을 때는 책에만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전자기기 등을 멀리해두는 편인데요. 

마치 정해둔 시간 동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듯,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에 푹 빠져들고야 말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죠. 그러면 같은 책을 읽더라도 그 책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책의 중심 내용과는 다른 해찰거리들이 보이고, 또 오늘날 나의 고민에 적용할 부분들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도 해보고 그러는 것이죠.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보자면, 무엇보다도 책을 펼쳐 든 제가 가장 신이 나고 짜릿해지는 순간은, 어렴풋하게 ‘느낌’이 오는 책을 붙잡고 앉아 열심히 귀를 기울이다보니 생각치도 못한 굉장한 이야기를 얻어듣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예상 밖의 이야깃거리’를 만났을 때는, ‘예상했던 이야깃거리’를 얻는 것보다 훨씬 즐거워지고 또 이런저런 생각치도 못했던 생각들이 터쳐나오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프레임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벗어볼 수도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프레임을 벗어나는 생각이란 예상할 수 있는 것의 바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쓰여진 책, 낯선 경험은 나에게 의외의 쐐기가 됩니다.

약간의 사족을 붙여보자면, 지난 레터에서 읽었던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데어라 혼, 2023)의 독서 역시 그런 경우였는데요. 

지난 레터에서는 배리언 프라이라는 ‘낯설고 이상한’ 인물에 대해 다룬 챕터 하나를 중점적으로 다루어보았습니다만, 실은 그 책을 읽는 내내 저는 굉장히 낯선 읽기 경험에 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특히 책을 읽는 내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은 저자로부터 맹렬히 비판당하는 경험(?) 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제목처럼 ‘죽은 유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데요. 예를 들면 지나치게 화려한 홀로코스트 전시회, 이미 죽어서 가엾어진 안네의 일기장, 쉰들러리스트와 관련된 스토리에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저자는 죽은, 안전한 애도에는 마음껏 생색을 내지만 현재진행형의 유대인 차별, 억압에는 눈을 감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차없이 지적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저의 부끄러움을 직시하고, 기존의 프레임을 점검하고, 또 겸허히 반성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자 자신만의 고민이 가득 배어있는 책을 나름의 각오로 통과할 때는 독자는 하나의 교훈만을 얻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훈은 반드시 사람의 프레임을 깨어 부수게 됩니다. 카프카가 “책은 도끼여야 한다!(링크)”고 했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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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최신식 기술의 시대가 되어도, 내가 원하는 내용만을 쭉 뽑아내는 검색만으로는, 요약의 엑기스만 뽑아놓은 내용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종류의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레임을 깨는 것은 지식을 쌓는 일이라기보다는, 나를 골똘히 의심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 꽤 비효율적이고 낯선 일이니까요. 직접 뒹굴어보고 해찰해보고, 깨어져보는 수밖에요.